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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진채 Oct 08. 2023

사쿠라

이 땅에 뿌리박고 사는 나무한 테 들입다 ‘사쿠라’ 라 하면, 듣는 사쿠라는 기분이 안 좋을 것이다. 우리말로 엄연하게 벚꽃이라는 이름이 있는데도 말이다.


내 심성이 비뚤어져서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사는 곳에서 1킬로쯤 떨어진 곳에 행주산성이 있다. 임진왜란 때 개떼같이 몰려오는 왜적을 막기 위해 우리 어머니들이 행주치마에 돌을 담아와 그걸 밑으로 굴려서 그 무리를 막았다는 그 성 자리가 있는 곳이다. 고양시가 내 고향은 아니지만, 이곳에서 30년이 넘도록 살았으니 그 기개를 존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번 여름에는 가능하면 움직이지 않았다. 날이 더우니 나 같은 늙은이에겐 무리인 것 같아서 날이 좀 누그러지기를 기다렸다. 그런 시간이 벌써 두 달이 넘었다.

추석 연휴가 끝난 오늘은 큰맘 먹고 아침에 운동화 신고 나섰다. 언제봐도 정갈하게 관리되고 있는 행신역에서 강매역까지의 산책로를 걷는 것은 다른 지역 사람들은 누릴 수 없는 호강이다.


걷다가 멈칫했다. 길옆에 길게 늘어선 가로수들이 벌써 잎사귀 털어내고 맨몸으로 서 있는 게 아닌가. 그 주위에 선 어느 나무도 그런 맨몸은 없다. 유난스레, 가로수랍시고 서 있는 사쿠라들만 그렇다.

오늘은 온전한 가을이 채 오지도 않은 10월 4일이다. 다른 나무들은 단풍으로 갈아입을 기색도 없는데 채신머리없는 사쿠라들이 남보다 먼저 옷 벗고 있는 게 온당한 짓인지 눈에 거슬린다.


저것들은 지난겨울 추위가 가시기 전인 이른 봄부터 잎사귀도 피지 않은 채 꽃을 피우고 방정떨던 족속들이다. 누가 이 아름다운 산책로의 가로수로 사쿠라를 선택했는지 모르겠다. 사쿠라가 늘비한 곳은 여기뿐이 아니다. 나라 곳곳에 가로수로 사쿠라를 심은 곳이 놀랍게 많다. 요즘은 나라의 높은 이 부근에도 사쿠라가 어른거린다.     


이 땅에 어쩌면 생각지도 않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방정맞은 생각이 든다. 이순신 장군 같은 어른이 안 보이는 것이 가슴 아프다. 속내가 훤히 보일 것 같은 인간이 갑자기 기를 펴고 득세하는 게 온전한 나라인가? 마음이 무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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