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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진채 Nov 06. 2023

아흔한(91) 살 먹은 수줍은 누나

아침에 운동하러 나가면 자주 만나는 할머니가 있다. 바퀴 달린 의자를 밀고 다니다가 세워놓고 앞으로 돌아가 그 의자에 앉아서 오가는 사람들을 그윽한 눈매로 바라보신다. 언젠가 내가 앉아 있는 벤치 곁에 자가용 의자를 정차하고 내게 말을 거셨다. 자기를 모르겠냐고. 내게는 제일 미안한 질문이다. 자신은 의자를 밀고 다니기 전, 그러니까 두 발로 힘차게 걸을 때부터 나를 봐왔다고 하셨다. 내 하얀 백발을.   

  

나는 아파트 같은 단지에서 20년을 이웃으로 산 아내 친구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 아내는 항상 그 변명을 하느라 애를 먹는다. 

“우리 아저씨는 최소한 백 번은 만나야 남의 얼굴을 기억하는 사람이야, 모르고 지나가더라도 너무 섭섭해하지 마.” 

아내 친구들은 나를 알면서도 모른 척하고 나는 기억에 없어 모른 척한다.   

   

할머니는 자신이 올해 아흔한(91) 살이라 하셨다. 그런데 엄청 부끄럼을 탄다. 무슨 말을 하고는, 입을 막고 고개를 돌리면서 부끄러워하신다. 꼭 열아홉 먹은 새색시 같다. 나하고는 열여섯 살 차이니 조금 애매하지만 ‘아흔한 살 먹은 수줍은 누나’라고 부르기로 했다.

지난번에는 내게 서라고 손짓하시더니 가방을 뒤적여 눈깔사탕을 하나 주신다. 그러더니 또 입을 막고 고개를 돌린다. 아이참, 누나도!   

  

오늘 며칠 만에 ‘아흔한(91) 살 먹은 수줍은 누나’를 만났다. 손을 들어 불러 세우시더니, 아침에 이곳을 몇 번이나 오가느냐고 물으신다. 한 번이라고 했더니 아주 실망하는 기색이다. 아직 젊은 녀석이 겨우 한 번이냐고 생각하신 것 같다. 미심쩍은지, “ 한 번?”하고 또 재차 확인하신다. 기가 막혔다.     

 

수줍은 누나가 보기에는 내가 이팔청춘으로 보였다는 말인가? 

고맙기는 한데, 누나, 내 나이도 장난이 아니라니까요!

내 아들이 내년이면 쉰하나에요!   

  

아! 우리는 지금, 결이 다른 착시(錯視)로 서로를 위로하고 있구나. 

다음에는 나도 누나에게 드릴 눈깔사탕을 준비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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