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가버린 시류(時流)를
곱씹는 늙은이

노인의 노래

by 임진채

나는 요즘 전철을 타면 무조건 경로석 앞으로 간다. 일단 경로석 앞에서 일반석에 빈 좌석이 있는지를 살핀다. 빈 좌석이 안 보이면 경로석 앞에 서서 목적지까지 간다.


전철 안에서 벌어지는 풍경도 예전하고는 많이 달라졌다. 예전에는 쭉 늘어서 있다가 행여 빈자리가 나오면 그 앞에 있던 젊은이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는 척하면서 슬그머니 자리에 앉아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 그 풍속은 사라졌다. 이젠 어느 젊은이도 옆을 돌아보며 머뭇거리는 일 없이 그냥 앉는다. 그걸 바라보며 섭섭한 표정을 짓는 노인도 이젠 없다


예전에 어떤 노인이 “그래 너희들이 앉아라. 이 새끼들아! 너희들은 앞으로 살아갈 날이 엄청나게 많아 앞을 생각하면 아득할 거다. 우리 늙은이들이야 금방 죽을 몸인데 잠시 서서 간들 어떻겠니? “했다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경로석에서는 이상한 일이 종종 일어난다.

경로석에서는 여전히 장유유서(長幼有序)가 통한다.

앉아 있다가 자기보다 늙어 보인다든지 몸이 성치 않은 사람이 타게 되면 망설이지 않고 자리를 양보한다. 그런데 양보한 자리에 당연하다는 듯이 앉는 노인을 본 적이 없다. 자신은 괜찮으니 그냥 앉아가시라고 사양한다. 이 아름다운 광경은 경로석이 아니면 전혀 볼 수 없는 진귀한 풍경이 되어 버렸다.


나는 전철을 탈 때마다 그런 생각할 때가 많다. 나이가 많아서 자리에 앉고 싶은 게 아니라 끊어질 것같이 아픈 허리 때문에 잠시만이라도 좀 앉았으면 좋겠다는 그런 생각 말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그걸 내색하는 노인은 얼마 안 될 것이다. 이제 양보의 미덕이 사라진 것에 대해서 섭섭한 마음이 들 것 같아서 아예 일반석 앞에는 서 있지 않은 게 보통 노인들의 행동일 거다.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이 사회의 도덕이 예전으로 다시 회귀해야 한다는 그런 소망 때문은 아니다.

흘러가 버린 물이 되짚어 올라올 수는 없다. 지금 내 소망이라면 앞으로의 우리 사회를 지탱할 수 있는 새로운 윤리의식이 형성되었으면 좋겠다는 희망이다. 이런 식으로 조그만 배려도 인색한 사회 형태가 사회 발전에 득이 될 일은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한 시대는 가고 다른 시대가 온다면 새로운 시대는 지난 시대보다는 긍정적인 내용이어야 한다. 적자생존(適者生存)이 아니라 살아 숨 쉬는 누구나 다 똑같이 연락하게 생존해야 한다.


써 놓고 다시 읽어보니 예전에 나 초등학교 다닐 때, 월요일이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 놓고 조회할 때 교장 선생님이 올라와서 하신 말씀하고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면 나는 이미 꼰대란 말이 되겠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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