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짙은, 아주 짙은 그림자

by 임진채

친구는 나를 보더니, 동지섣달 그믐께에 소복하게 쌓인 장독 위의 눈(雪)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눈썹까지 하얀 내 흰머리를 바라보던 또 다른 친구는 한숨을 깊이 삼킨다. 나는 친구들의 짜글짜글하고 골 깊은 주름에서 우리가 잃어버린 세월의 양(量)이 보여서 화들짝 놀란다.


매년 만나는 모임이지만 개중에는 어쩌다 서로 엇갈려 몇 년 만에 보게 되는 얼굴들이 있기 마련이다. 묵은 친구를 오랜만에 만나는 것이 반갑지 않고 싸아하게 가슴을 관통하는 아픔일 수도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가을도 깊어 버린 즈음에 바스락거리는 갈잎들이 서로를 바라보는 연민 가득한 시선들 말이다.



사람이 숨을 딱 멈추는 순간을 본 적이 있다. 교통사고 현장에서다. 우리가 지나갈 때 사고 수습은 대충 끝난 뒤였다. 지나가는 차들을 세워 가망이 있어 보이는 환자들은 태워 보냈고 이미 숨졌다고 판단된 두 사람만 길 한복판에 그대로 방치되어있었다.

내리지 않고 차 안에 앉아있던 내가 그 두 사람을 계속해서 주시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연히 내가 그쪽을 볼 때 한 사람의 머리에서 순간적으로 힘이 스러지는 것을 확연하게 느낄 수 있었을 뿐이다. 우연이었지만 확실했다. 죽음의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숨이 멎는 순간 그의 머리카락은 갑자기 불어대는 바람에 흩날렸다. 먼지가 거의 없는 아스팔트 위였고 입성도 깨끗했는데 갑자기 흙을 한 줌 뒤집어쓴 듯 범벅이 된 머리칼이 가을바람에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엉겁결에 하늘을 쳐다봤다. 구름 한 점 없이 푸르기만 했다. 그 푸른 하늘에 영화에서 곧잘 나오는 독수리 떼가 선회하는 모습 같은 것은 없었다. 그냥 무심하게 투명하고 짙은 푸르름이었다. 단지 그의 주검 뒤편 길옆에 가녀린 코스모스 몇 송이가 몸을 흔들며 오열하고 있었을 뿐이다.


죽음은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처럼 우리 가까이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단지 우리가 확인하지 않을 뿐 사람의 죽음은 일상사 인지도 모른다. 그렇다. 생성도, 소멸도 상존(常存)한다. 아주 특별한 경우에만 우리의 관심이 거기에 머무를 뿐이다.



자리 펴고 누운 기억이 없는데 다시 깰 수도 없을 것 같은 길고 긴 잠자리에 누워있는 것 같다. 깜깜한 어둠에서 자꾸 헛헛한 가슴을 쓸어내리고 있는 자신을 들여다 본다.


귀를 기울이지도 않았는데도 어두운 밖에서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는 갈수록 선명해진다. 시간도 알 수 없는 어둠에 나는 누워있다. 이 짙은 그림자를 어쩌란 말인가.


비 내리는 캄캄한 밤에 그림자가 보이다니........



20110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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