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보시(布施)

by 임진채

내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보시(布施)'라는 말을 좋아한다.

약간 쓰임새가 다른 '시주(施主)'라는 말에 비해서 그렇다는 의미도 되겠다. 보시란 행위의 주체가 상호적인데 시주란 신도가 사찰이나 스님에게 드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런 것 같다.


시주란, 효녀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려고 공양미 삼백 석을 받기로 하고 약속 이행의 방법으로 현실적으로는 최악인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비장한 이야기가 있다. 해피엔딩을 전제로 한 구성이라 할지라도 불교의 궁극을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에 잠시 멈칫했던 때도 있었다. 신앙은 원래 기복(祈福)적인 색채가 있겠지만, 그 거래가 사람의 생명이라는 게 섬찟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에 반해 보시(布施)라는 말은 일단은 정겹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적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길게 말할 입장은 아니다.



내 친구 중에 한 분은 목소리가 참으로 낭랑하다.

세월의 더께가 두터운데도 십 대에서 멈춘 것 같은 성량(聲量)의 서울 토박이말 씨는 청아하기까지 하다.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도 그렇지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즐겁게 한다.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축복받을 유산이다.


그 친구가 우울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럴 때의 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대에게는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만이 아니라 자신이 평소에 닦아온 수양의 몫이 분명하다. 어느 가슴엔들 차마 열어 보일 수 없는 그늘이 어찌 없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결국 내가 내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청량감을 주는 낭랑한 목소리와 그에 걸맞게 밝은 이야기만 골라서 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씨임이 분명하다.



며칠 전에도 그 친구하고 통화를 했다. 아주 긴 통화는 아니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문득 보시(布施)라는 단어가 떠올랐던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누구에게 베푸는 것은 꼭 재화나 생색이 아니어도 무방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공양미 삼백 석에 아버지 눈을 밝힌 천하의 효녀 이야기보다 가슴의 울림은 더 청아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 이 시각에 내 친구는 얽히고설킨 세상 따윈 잊고 편하게 자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20110714




keyword
작가의 이전글짙은, 아주 짙은 그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