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불교 신자는 아니지만 ‘보시(布施)'라는 말을 좋아한다.
약간 쓰임새가 다른 '시주(施主)'라는 말에 비해서 그렇다는 의미도 되겠다. 보시란 행위의 주체가 상호적인데 시주란 신도가 사찰이나 스님에게 드리는 행위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그런 것 같다.
시주란, 효녀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려고 공양미 삼백 석을 받기로 하고 약속 이행의 방법으로 현실적으로는 최악인 인당수에 몸을 던지는 비장한 이야기가 있다. 해피엔딩을 전제로 한 구성이라 할지라도 불교의 궁극을 왜곡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의구심에 잠시 멈칫했던 때도 있었다. 신앙은 원래 기복(祈福)적인 색채가 있겠지만, 그 거래가 사람의 생명이라는 게 섬찟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에 반해 보시(布施)라는 말은 일단은 정겹다. 어렸을 때부터 불교적이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나는 불교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어서 길게 말할 입장은 아니다.
내 친구 중에 한 분은 목소리가 참으로 낭랑하다.
세월의 더께가 두터운데도 십 대에서 멈춘 것 같은 성량(聲量)의 서울 토박이말 씨는 청아하기까지 하다. 마주 앉아 이야기할 때도 그렇지만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아주 즐겁게 한다. 각별한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도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할 수 있는 것은 축복받을 유산이다.
그 친구가 우울한 이야기를 한 적이 없어서 그럴 때의 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상대에게는 밝은 모습만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부모에게 물려받은 유산만이 아니라 자신이 평소에 닦아온 수양의 몫이 분명하다. 어느 가슴엔들 차마 열어 보일 수 없는 그늘이 어찌 없을 수가 있겠는가. 우리가 살아온 세월이 얼마인데...
결국 내가 내 친구를 좋아하는 이유는 청량감을 주는 낭랑한 목소리와 그에 걸맞게 밝은 이야기만 골라서 하려고 노력하는 마음씨임이 분명하다.
며칠 전에도 그 친구하고 통화를 했다. 아주 긴 통화는 아니었지만, 수화기를 내려놓으면서 문득 보시(布施)라는 단어가 떠올랐던 것은 무슨 연유였을까? 누구에게 베푸는 것은 꼭 재화나 생색이 아니어도 무방하다는 의미가 아닐까 하는 마음이다. 공양미 삼백 석에 아버지 눈을 밝힌 천하의 효녀 이야기보다 가슴의 울림은 더 청아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지금 이 시각에 내 친구는 얽히고설킨 세상 따윈 잊고 편하게 자고 있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201107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