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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도 묻지 않고 가버리는 세월

by 임진채

오랜만에 사무실에 나왔다. 지지난 월요일 오전만 앉아 있다 들어갔으니 딱 두 주일 만인 모양이다. 그동안 착신 전환된 핸드폰으로 상담을 한 건 했으나 계약으로는 성사되지 않았으니 먹고사는 짓도 별로 성과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세월은 가는 것이고 그에 대한 내 반응은 걱정마저 지친 일상이 되고 말았다.



아침에 나오면서 보니 사철나무도 아닌데 유독 시퍼런 잎을 거느린 나무가 눈에 띈다. 목련이 아닌 것은 확실한데 목단(?)인가 하는 나무 같은데 내 안목으로는 알 수 없는 나무다. 목련이 지고 난 뒤 턱없이 큰 꽃을 피우는 나무로 기억하는데 이름은 잘 모르겠다.

먼발치로 보이는 은행잎은 간밤에 내린 비로 후줄근하게 젖었을 뿐 아니라 바람이 없었는데도 많은 잎을 떨어뜨리고 수척하게 서 있는 것에 반해 이 나무는 가는 세월 하고는 상관없다는 듯 여유작작하다.


사무실까지 오는 내내 생각해봐도 그 나무가 겨울까지 푸른 잎으로 싱싱할 것 같지는 않다. 가능할 때까지 버티다 마지막 순간에 우수수 떨어뜨려 버리는 것 아닐까 생각하지만 그건 내 사적인 판단일 뿐이다.

나무의 입장에서는 보내는 양분을 조절하여 서서히 단풍이 들게 하지 않는다면 별다른 방법이 있을 수가 없을 것 같다. 잎이 아직 푸른색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갑자기 양분을 공급받지 못한 잎들이 그냥 푸른 채 말라버린 모습일지도 모른다.

사인(死因)이 고사(枯死)인데 사후(死後)의 색이 무에 그리 중요하랴 만은 나뭇잎은 몰라도 사람이 가는 모습이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


멍하니 책상 앞에 앉아 있는데 느닷없이 출입문에 달아놓은 풍경이 급하게 울기 시작한다. 놀라 바라보니 늙수그레한 분이 전단 한 장을 책장 틈새에 올려놓고 간다. 식당 전단이다. 앉아서 오는 손님들을 기다리는 데 한계를 느껴 직접 사무실마다 돌아다니며 전단을 돌리는 모양이다.

큰애가 식당을 개업하고 또 그 가게가 마치 단풍이 들 듯 서서히 붉게 물들어 결국 폐업하는 것을 지켜봐서 그 이파리들의 고달픔이 바로 와 닿는다.


어려운 건 어디 식당뿐이겠는가. 영세기업이나 다른 자영업도 마찬가지다. 이 건물만 해도 내가 세 들어 있는 8층에만 네 군데나 비어 있는지 오래됐다. 직접은 아니라 할지라도 서로 상관이 있어서 그 여파는 생각보다 넓게 미친다. 속도만 느릴 뿐 질이 좋지 않은 역병(疫病)이 분명하다.


밖은 비만 내리지 않을 뿐 기분 나쁜 궂은날이다. 아침에 내린 비의 물기는 시나브로 마르는 것 같은데 찌푸린 얼굴은 여전히 펴지 않고 있다. 그러고 보니 지금은 11월이다. 이렇게 이 가을도 가는 모양이다.


핸드폰이 바르르 떨어서 들여다봤더니 병원에서 보낸 문자다. 이번에는 치과(科)다. 요즘 나를 가장 반기는 곳은 병원뿐이다. 과(科)도 자꾸 늘려가면서......

갑자기 추워진다. 아직 난로는 꺼내지도 않았는데.


20121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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