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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이 심한 나라

by 임진채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요즘 날이 너무 더우니 시원한 이야기로 시작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상당히 오래된 이야기다. 자고 일어나서 밑을 내려다봤더니 눈이 소박하게 쌓여 있었다. 일요일 새벽이어서 촬영하러 가도 되는 날씨인지를 알아보는 것이다. 눈이 저리 쌓여 있으면 찍을 모습은 많겠지만 나 같이 겁이 많은 사람은 미끄러운 길을 운전하는 게 부담이 된다.

가까운 파주 출판도시로 정했다. 조형적인 모습이 많은 곳이다.


아침 해가 고개를 디밀고 올라오는 시간이었다. 사람이 다닌 흔적을 따라가야 할 정도로 눈이 쌓였고 그 좁아진 길은 발자국으로 뒤범벅이 되어 있었다.

앞에는 젊은 남녀가 조심스레 걷고 있었다. 별생각이 없이 따라가는데 앞 여자가 미끄덩하더니 뒤로 꽈당하고 넘어진다. 엉덩이가 깨진 것은 아닐까 걱정하는 순간 젊은 여자가 일어서면서, “에!~이 씨발!”한다.


나는 아무 생각하지 못했다. 많이 아프겠다고 하는 염려할 시간도 없었고 젊은 여자가 저렇게 리얼(real)한 욕을 한다고 하는 생각도 할 짬이 없었다. 그런데 여자는 일어서기 전에 내가 뒤에 서 있는 것을 발견하곤 혀를 날름하더니 벌떡 일어나, 내려다보고 서 있던 남자를 재촉해서 가던 길을 간다.


나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걷는 그들을 다시 따라가면서 날이 참 춥다는 생각만 했다.

아 참, 여자가 욕해놓고 내게 들킨 게 무안해서 혀를 날름하다니 귀엽다는 생각도 했다. 같이 걸어가는 저 한 쌍은 절대 연인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도 했다. 같이 걷던 여자가 미끄러졌는데 멀뚱히 내려다보고 서 있는 남자는 남자가 아닌 게다. 그냥 아는 놈이었을 것이다.


본론으로 가자.

파주 출판도시는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일산 신도시가 생기면서 조금 떨어진 파주에 만들었다. 내가 시작부터 지켜봐서 잘 아는데, 거기는 그리 큰 곳이 아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입구에 ‘파주 출판단지’라고 했는데 어느 사이에 ‘파주 출판도시’로 슬그머니 간판이 바뀌었다. 가보신 분은 알겠지만 사진을 찍으면서 걸어도 30분 이내에 도시의 끝에 이르는 곳이다. 엄격하게 따지지 않더라도 아주 작은 동(洞)에도 이르지 못하는 곳이다. 그런 곳을 감히 도시라고 말하는 것은 해도 너무한 것이다. 그러니까 ‘도시’라고 부풀리는 것은 심해도 너무 심한 뻥인 게다. 이건 같은 값이면 다홍치마가 좋다는 식으로 해석해주지 않으면 ‘뻥쟁이’ 소리를 면할 수 없다.


오늘은 아내가 수영장에 가는 날이어서 방학 중인 유치원 1학년인 다섯 살 손자를 돌보는 게 내 임무가 되었다. 나하고 있을 때는 아무 말도 없던 녀석이 제 할머니가 오자 대뜸 하는 소리가 가관이다.

“할머니 나 배고파서 죽는 줄 알았어요. 빨리 밥 줘요!”


이제 겨우 다섯 실인 녀석이 몇 끼가 아니라 겨우 한 끼를 그것도 겨우 한 시간 정도 늦었는데 죽을 뻔했다니. 누구에게 배운 언사(言辭)일까?


우리 식구는 그 책임을 벗어날 수 없다. 어찌 생각하면 우리는 ‘뻥’이 아주 일상이 된 그런 민족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튀는 뻥은 이루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로 우리 말에 녹아 있다.


“팥으로 죽을 쑨대도 믿을 수 없다.” 혹은 “이게 진짜로 가짜가 맞아요?”라거나 더 심하게는 “우리말은 팔 할은 제하고 들어야 한다”라는 소리를 듣고 또 사용하면서 살아온 우리의 전통이다.

자랑스러운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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