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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죽고 싶으세요?

by 임진채

많은 사람과 차량이 지나다니는 한강 다리 위에서 한 젊은이가 뛰어내리려고 한다. 그걸 지나가는 사람이 보고서 모른 척할 수는 없다. 가능한 한 가까이 가서 그러지 말라고 타이르는 동안 다른 사람은 경찰에 연락한다. 우리나라의 자연스러운 정서다.


왜 죽으려 했을까?

강원도 정선에 휴가 때 친구들과 놀러 갔다가 유혹을 참지 못해서 카지노를 한 게 감당할 수 없는 결과에 이르게 됐다. 그래서 이 한목숨 초개(?)와 같이 버려서 이 사회에 사행성 업소를 막기로 했다고 말한다면, 듣는 사람의 마음은 어떨까?



이 일을 다른 사람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다. 나는 일단 머리가 띵할 것 같다.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버리려는 이유가 자신이 짊어진 빚 감당이 안 되어서인지 정말 정의 사회 구현인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은 죽음의 명분이 사회 관념과 다르다고 해서 “그러면 네 일이니 네가 알아서 하든지·····.”하고 돌아서 그 자리를 떠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그렇게 쉽게 다뤄도 될 일이 아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어 얻은 생명일지라도 그게 그렇지 않다. 종교적 해석을 떠나서도 손톱의 매니큐어 색 바꾸듯이 결정할 일이 아니다.


결은 다르지만, 이 나이가 되자 자연스레 죽음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겉으로 드러나는 가장 큰 변화는 옷이나 일상에서 필요한 물건을 사는 것까지 망설이게 된다. 은연중 죽음을 염두에 둔 것이다. 농담이라도 빨리 죽어야지 하는 마음은 없지만, 진시황제처럼 불로초를 구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나도 한때 죽음을 두려워한 적이 있다.

사십 대 초반에 갑자기 목에 싸아하게 통증이 와서 동네 병원에 간 적이 있다. 의사가 나를 보더니 다짜고짜 큰 병원으로 가라면서 자신의 병원에는 없는 구급차를 수배하고 간호사를 곁에 태워서 대학병원으로 보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것 같은데 구급차는 싸이렌 소리 요란하게 울리며 달리고, 곁에 앉은 간호사는 내 얼굴에서 눈도 떼지도 않고 있다. 응급실에 들어가니 두 명의 의사가 튀어나와 보호자를 찾는다.

“이 환자 곁에서 절대 떠나지 마시고 조그만 이상이라도 보이면 즉시 알려주세요.”

응급실에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곧 죽을 것 같은 환자라도 보호자는 밖으로 내보낸다는 것을·····.


죽음이 어른거렸다. 억울했다.

삼천갑자 동방석이는 삼 년밖에 못 산다는 언덕을 구르고 또 구르고 해서 삼천갑자를 살았다고 했다. 나는 그런 언덕을 구르기는커녕 언덕을 보지도 못하고 죽어야 할 것 같았다. 이 얼마나 억울한 일인가 말이다.



주치의가 결정되고 그 의사 선생님은 심장마비 중상이었는데 운이 좋았다며 일단 담배는 안 된다고 했다. 고비를 넘겼다는 말에 나는 안도했다. 이틀 뒤 담배를 끊었냐는 질문에 거짓말할 수 없어서 곧 끊겠다고 했더니 화를 버럭 내더니 당장 이 병원에서 나가라고 했다.

내게 그렇게 화를 내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당장 끊겠다고 약속했다. 맹세하는데 그 후에 나는 담배 한 개비도 입에 대지 않았다. 죽는 게 그렇게 싫었다.



그 후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 나는 죽음에 그리 신경질적이지는 않다.

그렇더라도 눈이 아리고 아파서 정신을 차릴 수 없는 지금도 “콱 죽어버리고 싶다.”라는 말은 안 한다.

사는 데까지는 살아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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