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쓰러운 나

by 임진채

하루라는 시간을 겪는 동안의 일이나 생각을 ‘일상 기록’이라는 제목으로 써가고 있다. 그러고 보니 그 세월이 벌써 4년이 다 되어간다. 하루 단위로 쓰고 그걸 월말이면 프린트해서 파일하고는 다른 곳에 보관하고 있다.

어제는 9월 치를 프린트하는데 잘 진행되어가던 작업이 도중에 예고 없이 기계가 서버린다.

이런 때는 나는 정도 이상 긴장하게 된다. 원래 기계치(機械痴)인데다 내 판단에 첨단 기기라는 생각이 들면 정도 이상으로 졸아버리는 버릇이 있다.

복합기는 내가 만만하게 상대해도 되는 기계가 아닌 것은 분류되어 있다. 첨단이라고 하면 웃을 분이 많을 것이지만 내 수준은 솔직하게 그 언저리에서 맴돌고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원본을 넣고 단순하게 하는 복사는 잘 된다. 그 외에 팩스도 둔한 내 감(感)으로는 이상이 없어 보인다.


자꾸 시계로 눈길이 간다. 학교 수업 마치고 태권도 도장에 간 손녀를 마중 가는 게 내 임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안 되는 것을 내가 만지작거린다고 될 리가 없지만, 그래도 전장(戰場)을 떠나는 것은 비겁한 일이지 싶기 때문이다. 손녀를 데리고 집에 와서도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사무실에 나오자마자 복합기에 매달렸다. 이거는 건들면 안 되겠다 싶은 곳은 피하고 다 체크를 하고 다닌 것이다. 어딘지 모를 잘못된 곳을 이런 식으로 누르고 다니는 게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것은 안다. 그러나 오늘이 토요일이기에 에이에스센터에 도움을 청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그냥 월요일을 기다리는 것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니다.


거의 정오까지 그 짓을 하다 보니 지쳤다. 오늘만 거의 네 시간을 그 캄캄한 곳을 헤매고 다닌 것이다. 그러다 복합기의 기종 세 대 중 하나를 선택하는 항목에 시선이 멈췄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지금 설정된 기기가 아닌 기종을 산책해 봤다. 된다. 거기가 맥(脈)이었던 거다.


어떻게 해서 내 의사와는 달리, 기종 설정이 기계를 사용하는 중에 바뀐 것인지는 모른다. 정확하게 그거라고 확신을 가진 것도 아니다. 아니면 말고 하는 식으로 더듬고 다녔을 뿐이다. 내가 아는 범위에서는 사실이 그렇다. 거의 모든 것을 내가 잘 모른다는 그 기막힌 사실을 나는 이제 인정해야 한다.


점심 먹으러 갈 생각도 못 하고 늘어져 앉아 있다. 주위에 이런 일 정도를 내가 의논할 만큼 아는 사람이 없다는 아쉬움도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는 경구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안 배우고도 아는 사람이 많다는 것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이 나이를 먹었으면 점에 백 원 내기하는 고스톱판 뒤에 앉아 있는 것이 더 자연스럽다는 것도 잘 안다.


모르는 것은 다 모르고, 아는 것은 다 안다. 그 구성이 꼬이는 바람에 나는 이리 참담하게 나 자신이 나를 안쓰러워하고 있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더 이상 안쓰럽게 보여서는 안 될 것 같다. 그 대책이 필요하다. 정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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