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만불짜리 그녀
법인여신을 담당하던 어느날, 당연히 언제나처럼 흐리멍텅한 눈을 하고, 뭐라고 심사의견서를 써서 이 망해가는 회사를 그나마 덜 추레하게 포장할수 있을까. 아니 정확히는 어떻게 써야 올해도 무사히 넘어갈수 있을까 고민하고 있는데.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조용히 불렀다.
"저기요-"
"네?"
"환전 좀 할 수 있을까?"
내가 고민할때 짓는 표정이 화난 줄 알았다는 선배도 있었고, 가끔은 영혼이 나간것처럼 보인다고 하신 선배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공통된 의견은 뭔가를 고민할때의 나는 "바빠보이지가 않는다" 였다.
역시나 그 아주머니에게도 내가 굉장히 할일없는 여자로 보였던것 같다. 그리고 변명하자면 노는거 같아보여도 법인 업체에서 전화오면 환율도 잡아줘야하고, 업체에서 아주 희안한 것들이 궁금하다고 전화오면 그것도 찾아줘야하고, 틈틈히 전산도 타고, 심사의견서도 쓰고, 지점장님이 탁감해라 감정해라 하는것도 의뢰하고, 등기도 무한대로 뽑아대고 그런다. 해외송금 잘못 나가면 그거 뒤처리도 해야한다.
"예금창구 번호표 뽑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아니 액수가 좀 커서..."
"번호표 뽑고 기다려주세요"
내가 여기서 나한테 부탁하는 한명을 해주면, 기다리고 있는 모든 고객들이 나에게 오기 때문에 안내후에 다시 일을 시작하는데, 이 아주머니는 내 뒤에 착하게 생긴 차장님이 탕비실로 가시는데 따라 붙었다. 뭐라고 하셨는지 두분 우리지점의 작은 회의실로 들어가셨고, 정말 한 30분 있다가 나오시더니, 아주머니가 90도로 인사하더니 가셨다.
"차장님 먼데요?"
"백만불짜리 달러 본적있나? 나는 봤다..."
"네?"
"한국돈으로 바꿔달래"
아 액수가 크다는게... 그런 의미였구나...
"어디서 났대요?"
"미국에서 사업을 했는데, 정리하고 한국왔단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어요?"
"우리는 작은 지점이라 10억이 현찰로는 없다고 했어. 저기 강남에 큰 지점 가시라고"
정말 차장은 아무나 되는것이 아니다. 나는 고객이 나한테 이 이야기를 꺼내면, 일단 정신이 이상한 사람인지 아니면 나를 속이려고 온 사람인지가 먼저 궁금했을거고, 진짜 말문이 턱 하고 막혔을텐데, 나는 진짜 뭐라고 했을지 감도 안온다.
그리고 아직도 궁금하다. 정신이 이상한 사람이었던걸까, 아니면 진짜 12억(당시 환율) 받아가려고 한 사람이었을까. 나한테 저 지폐를 꺼내지 않은게 다행이다. 너무 당황해서 "저랑 장난하시는거에요?" 라는 말이 자동반사로 튀어나와서 고객의 소리에 내 이름이 또 오르내릴 뻔했다. 아니 전 금융권에 공동으로 시행하는 미스테리 쇼퍼였던 걸까? 극한의 상황에서도 친절한 애티튜드를 잃지 않는지...
20년 코로나19 때문에 소상공인 대출을 무지막지하게 찍어내던 시절. 고객 상담하면서 대출을 하루에 9개, 10개씩 실행하곤 했다. 소상공인 살리려다가 내가 죽을 뻔했다. 상담하면서 실행하고, 야근하면서 승인올리고, 아침에 일찍와서 여신서류 정리해서 결재 올리고 숨넘어가게 일하던 어느날.
'띵동'
"(완벽하게 준비된 서류를 내밀며)소상공인 대출받으러 왔는데요"
고객을 나이로 차별할 생각은 없지만, 갓 20살. 가져온 서류들 진위확인하니 가짜, 세금계산서 조회하니 발급된 적이 없는 세금계산서, 등본상 거주지 내가 일하던 지점에서 KTX, SRT 타고 세시간, 사업장 임대차 계약서상 사업장주소 "인근모텔". 그리고 "임대인 김ㅇㅇ(00년생)" 그리고 그 이름 옆에 찍힌 도장은 얄팍한 타원형 한글 도장...
아무리 디지털 마케팅 홍보업이라고 해도 모텔을 누가 사업장으로 하나. 그리고 00년생이 숙박업소의 1개 호수를 구입 후, 혹은 전대로 임차를 준다?. 그리고 임대차 계약서에 당당하게 찍어온 도장 우리랑 거래하는 법무사님도 쓰시는 글씨 끼워서 만드는 도장이었다.
* 도장 이미지 출처 : 잠실 반지공방 웯우드스튜디오에서 커플링했어요! : 네이버 블로그 (naver.com)
면전에서 사기라고 하는건 약자인 금융소비자를 대하는 올바른 태도가 아니기 때문에, 면전에서 사기라고 하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돌려보냈다.
그날 오후에 다른 갓 20살, 21살 2명이 서류를 똑같이 잘 꾸며(역시 진위확인으로 조회 안 됨, 사업장은 그 모텔 다른 호수) 방문해서 왜 대출 안해주냐고 으름장을 놓고 가지를 않나...
화가나는 포인트 첫번째는 "진위확인 안되는데요?" "이거 누가봐도 대출사기에요" "브로커한테 수수료 몇프로 주시기로 했어요?(정말 궁금)"라고 말하지 못한다는 것,
두번째는 지구 한바퀴 돌려 말하기로 내 소중한 시간이 이렇게 낭비되고 있다는 것,
세번째는 사기꾼 때문에 가뜩이나 밀려 있는 창구가 더 밀리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날 또 오더라. 정말 작년에 왔던 각설이 죽지도 않고 또왔네가 절로 입에서 나올 지경. 이미 전날 선배님들하고 차장님하고 공유되어있던 이야기라서 이번에는 차장님께 메신저를 했고. 난 조용히 뒤로 빠졌다.
여자치고 키도 크고, 강단도 있으신 우리 차장님.
"어제도 똑같은 서류 가져오셔서 돌려보냈었는데, 저희 그렇게 안멍청해요. 그만오세요."
그 어린 친구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져서 자리를 박차로 일어나서 나갔고, 다시는 사업장이 모텔인 임대차 계약서를 볼수없었다. 그 친구 지금 뭐할까.
소상공인 대출만 사기가 있었을까? 지금은 워낙 고금리라 애초에 대출에 대한 니즈가 높지 않지만, 한창 저금리였던 20-21년에는 개인 신용대출도 사기서류 가져오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햇던 홍길동의 마음을 알것 같다.
나도 사기꾼을 사기꾼이라 부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