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위한 글쓰기 역량을 향상코자 브런치를 시작하오니 승인하여주시기바랍니다.
어느 사회나 그 사회만의 언어가 있겠거니 싶다. 나무위키에서 "언어"에 대해 찾아보니 "인간이 일반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체계"란다. 작게는 하나의 단어, 넓게는 그 표현과 성조와 말의 높낮이와 속도. 당연하게도 직업, 계층, 지역 어떤 사회집단에 속하냐에 따라 그들만의 언어가 있으리라 싶다.
8시 20분부터(은행의 오픈은 9시지만 나의 출근은 8시 20분이다) 6시까지, 아주 정확히는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이 아닌 손끝에서 나오는 언어만 따지자면 9시부터 6시까지. 청자, 독자에 따라 다소 공격적이게 느껴질 수도 있고, 꽤나 직설적인 나의 언어(말과 글 모두)는 9-6만큼에는, 조심스러우며 보수적인 “은행어”를 구사한다.
처음 법인대출을 맡게 되었을 때 차장님은 나에게 일주일에 심사의견서(대출을 승인받기 위해 해당 대출의 구조와 차주의 재무, 영업현황 등에 대해 서술한 글)를 하나씩 읽으라고 시키셨다. 몇십, 몇백억 짜리 대출 승인받으려고 쓴 심사 의견서면, 일 잘한다는 애가 썼을 것이고, 누구보다 열심히 썼을 테니 읽어라. 이해가 되지 않아도 읽고, 어느 때 어떤 표현을 쓰는지 익히라는 게 이유였다. 나의 방식대로 심사의견서를 써서 올리니 나의 심사의견서는 너무 구어체라며 지점장실로 불려 가 한소리 듣기도 했다.
심사 의견서란 마치 이런 건데.
- "재무안정성 지표가 열위하다"라고 쓰지 "재무가 불안정하다"라고는 잘 쓰지 않는다.
- ㅇㅇ라고 판단한다고 쓰지 않는다. "판단된다, 판단되어진다" 라고 쓴다.
- "자산규모"라는 표현은 당연해 보이나 생각보다 잘 쓰지 않고, “외형”이라는 단어가 자산규모라는 단어를 의미한다.
- "~하고자"를 꼭 "~코자"라고 쓴다. 나도 이유는 모르겠다.
- 그 외 갑자기 글로 쓰려고 하니 생각나지 않는 여러 가지 표현들.
서양 회화의 역사에서 해골은 죽음이요, 사과를 든 남자는 파리스, 사과를 든 여자는 아프로디테를 나타냈던 상징의 역사는 차라리 낫다. 해골 하나를 그려도, 다 같은 해골이 아니고, 부서진 해골을 그릴 수도 있고, 해골을 그림 구석에 애써 숨겨 은밀히 나타낼 수도 있는 것이니까. 아프로디테를 헐벗은 채 그릴 수도, 천 한 장 걸친 채 그릴 수도 있었을 테니 말이다.
여하간 심사의견서에 쓰이는 표현법이란 당최 나의 창의성은 허락하지 않았다(나의 논리는 허락하며, 논리는 필요하다). 물론 이 회사에 대출을 해줘도 되냐 안 되냐, 혹은 해주고 싶냐 아니냐에 관해서도 나의 의견 또한 없다. 나는 (아직은) 윗분의 의견에 따라 해야 하는 대출이면 논리를 만들어 내서, 그분들의 언어인 심사의견서의 언어로 페이퍼 한 장을 만들어내면 되는 것이다.
물론 어느 업계나 그들만의 은어, 업계 용어는 존재하는 법이다. 하지만, 내가 이 회사를 간절히 원해서 온 것이 아니라 그런지 몰라도, 윗분들이 알아듣기 쉽도록 정해진 표현만을 적재적소에 꽂아 넣어 써내는 심사의견서라는 세계가 그리 마음에 들진 않았다. 마치 정해진 도상대로 그림을 그려내는 중세시대 회화를 보는 듯한 느낌이랄까.
게다가 더 기분이 좋지 않았던 건 그런 글만 써대다 보니, 왠지 나의 정신세계도 조심스러우며, 보수적이 돼 가는 느낌 때문이기도 했다. 마치 애초에 뚜렷이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의 글세계가 우파가 되어 버리는 느낌이랄까.(내 꿈은 강남 좌파에 가깝다)
쨋든 내가 브런치를 하는 이유는 평일의 9 to 6, 보수적이고, 조심스러우며, 수동적인 도상학적인 심사의견서라는 글세계에서 벗어나, 내가 쓰고 싶은걸 나의 표현으로 쓰고 싶어서에 가깝다.
휴. 근데 벌써 문장이 길어지고 중첩되는 걸 보니 나의 글세계는 꽤 많이 물들어 버리긴 했다.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나의 글세계가 이미 꽤 많이 점령당한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