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년생 할머니가 대출을 받으러 오셨다. 저번에도 여기서 집 담보 대출을 받았는데, 돈이 또 필요하시다며 오셨다. 미리 콜센터를 통해 서류를 안내받으셨는지, 서류도 다 챙겨오셨다. 본인은 소득이 없어서 소득추정을 위해 신용카드 사용내역서를 가져오셨고, 배우자의 연금소득 증명서와 이런거 저런거.
단언컨데, 내가 심사올리는건 10분 컷으로 끝날것 같고, 그 수많은 서류에 자서를 받는데 20분, 그 수많은 서류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할머니가 이걸 이해했다고 내 스스로 납득할 만한 시간을 소비하는데) 20분 정도는 걸릴것으로 예상되었다.
'기존에 대출이 많은데다가 소득도 너무 적어서 DSR에 걸려 대출이 안될수도 있다'
희망(?)을 가지고, 전산을 태워봤다.
'앗, 해달라고 하시는 금액에서 2천만원이 모자른다'
대출은 안나가도 그만이다. 내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드높이고, 억지로 큰 글씨로 (나의 평소 글씨는 작은 편이다) 종이에 써가며, 설명을 해도 나는 사실 41년생 할머니에게 이 모든걸 설명할 자신이 없다. 사실 이건 누구도 없을것이다.
테니스를 치는데, 내가 아무리 잘치면 뭐하나, 상대가 받아주지 못하면 랠리가 되지 않는 것처럼, 내가 아무리 쉽고 자세하고 열심히 설명해도 안되는건 안되는거다.
"5년 고정금리 하시고, 그 이후에는 6개월 변동금리입니다" 라고, 대출 신청 받을때 대충 5번 정도 설명을 하고, 종이에 써서까지 드렸는데, 한참 또 다른이야기를 하시더니,
"5년 만에 이걸 다 갚을수가 없는데..."
나는 살짝 포기하고, 다음 이야기로 넘어갔다.
대출이 가능하신데 요청하신 것보다는 금액이 좀 적다는 전화를 드리고, 다음날 오셨다.
"안되는데... 안되는데... 내가 삼천만원을 꼭 쓸데가 있는데"
"DSR이... 아니 소득이 너무 적으셔서 대출이 천만원 밖에 안되요..."
"아유 내가 쓸데가 있는데..."
"아니 근데 소득이 부족하셔서 안되신다니까요..."
나의 구세주, 팀장님이 나를 부르셨다.
"대리님. 무슨 일이에요?"
소득이 부족해서 대출이 안되시는데, DSR에 딱 걸리는거라 답이 없는데... 라고 설명했다.
팀장님이 할머니와 회의실로 들어가시더니, 한시간넘게있다 나오셨다.
"아니 우리 어머님 같으셔서 내가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사정이 딱하시더라고"
그 사정은 내가 들어봤지만, 팀장님을 통해 들어서인지 내가 듣기에는 딱한 사정은 아니었다. 아니지, 언어의 문제가 아닌가, 나의 마음이 차가운 탓인가, 아니면 할머니에게 나의 어머니를 투영하기엔 내가 너무 어려서였나.
"그래서, 방법이 없겠어요?"
아 나의 똑똑함, 이게 문제다. 나의 뛰어난 두뇌에서는 답이 생각나 버렸다.
모든 대출은 할머니 이름으로 되어있는데, 할머니가 소득이 너무 낮아서 배우자 소득을 합산했던거고, 생각해보니 배우자인 할아버지는 대출이 없다. DSR 은 소득대비 부채이니, 할아버지로 차주를 바꿔서 올리면 삼천은 나오겠네.
솔직히 순간 고민했다.
'자서받는데 20분, 설명하고 이해시키는데 20분도 환장한다. 그래도 할머님은 부수거래가 다 충족중이라, 부수거래 설명까지는 안해도 되는데, 할아버지는 부수거래까지 다 설명(손님이 하던 안하던 설명하는것이 의무)하고, 하신다고 하면 그거 신규까지 하려면... 오전이 다 날아가겠군.'
그래도 나의 마지막 양심으로,
"팀장님, 제가 방금 생각이 났는데, 차주를 배우자인 할아버지로 바꾸면 대출이 나올것 같습니다"
나의 구원자, 그리고 할머니의 구원자 팀장님은 서류를 들고, 할머니 댁으로 방문해서 동의서를 착착 받아오셨고, 역시나 나는 10분 컷으로 심사를 올렸고, 너무 고령이라 심사팀에서 좀 싫어하긴 했으나, 대출은 승인이 났고, 서류도 팀장님이 받아오셨고.
"팀장님 부수거래는요?"
부수거래로 내 실적을 하고 싶어서가 절.대. 아니다. 그저 나는 부수거래 충족을 안해서 나중에 금리가 올랏을때 "설명 못들었다" "니가 물어내라며" 내 머리카락도, 내 통장 잔고도 뜯기고 싶지 않을뿐이다.
"금리 올라가도 괜찮답니다"
"다행이네요"
대출은 나갔고, 할머니는 그 딱한 사정을 해결하셨겠지.
영화 김복남살인사건에, 김복남의 친구 해원이는 은행원이다. 해원이는 쌀쌀맞고 차가운 대출을 담당하는 은행원이다. 해원이는 돈이 필요하다는 할머니를 매몰차게 거절하고, 소리도 지른다. 그런데 해원이이 후배가 할머니를 도와주고, 할머니는 후배에게 연신 감사인사를 하고 간다. 그리고 어떠한 오해로 인해 해원이는 후배가 본인을 물먹였다고 생각하고 후배를 한대 치고는, 정직을 처분받아, 복남이를 만나러 섬으로 가면서 이야기가 시작된다.
물론 나는 매몰차게 거절도 하지 않았고, 소리도 안질렀고, 천만원을 해주려고 했으나, 결국엔 쌀쌀맞은 해원이가 된것 같은 기분이었다.
팀장님한테 영화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이대리, 저 한대 칠거에요?"
"설마요. 저 생계형이라 정직 맞으면 안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