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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행생활자 Feb 16. 2023

상속

죽은 사람에 대한 예의는 상갓집에만 있는 걸까

아주 신입 때, 아니지 수습행원일 때라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그날 마감 후 예금계가 그 남자에 대한 이야기로 가득했던 것만은 기억난다. 단순히 예금계 직원들이 모두 아이를 둔 엄마였기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멀끔한 외양에 괜찮은 풍채도 갖춘, 꽤나 잘 차려입은 중년남자가 본인보다 열 살은 넘게 어려 보이는 여자와 은행을 방문했다. 하필이면 상속이었고, 또 하필이면 내 앞이었다.


은행원은 고객의 마음을 헤아릴 줄 알아야 하고 공감해야 한다고 연수원에서 배우면서, 교수님은 상속을 예로 들었다.

"배우자나 부모님을 잃은 고객분들이 상속 절차를 밟으러 오시면, 업무를 버벅대지 않고, 빨리 끝내드리는 게 가장 큰 서비스 아닐까요? 상속 절차 밟으러 오시는 분들은 그날 전 은행을 다 도셔야 할 테니까."

운이 좋게도 아직 직계의 가족을 잃어본 적이 없는 나였지만, 직계의 가족을 잃는다는 상실감은 상상만 해도 아니 상상이 안 되는 끔찍함이라,  고객 관련 교육을 받을 때 "상속할 때는 손님의 상실감에 대해 공감할 것"이라는 부분만큼은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은행원 된 도리를 넘어 인간 된 도리니까.


그런데 하필이면 이 고객님은 내 은행 인생의 첫 번째 상속 고객님이셨다. 교수님 말대로 빨리 끝내 드리고 싶었지만, 상속을 책에서만 배운 나로서는 벌써부터 망했다는 걸 체감했었다. 




상속에서 가장 중요한 건 지금 내 앞에 온 사람이 고인의 재산에 대한 정당한 권리자인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엄한 사람에게 고인의 재산이 가면 안 되니까.


멀끔한 중년 남자는 이혼한 아내의 사망으로 은행에 방문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여자의 사망사유는 목맴사. 목맴사... 교통사고나 질병으로 인한 사망이 아닌 목맴사... 교살이 아니라 목멤 사이니 자살이고, 자살의 원인은 다양하게 있겠지만 크게 우울증 아니면 어떠한 심적 고통일 텐데. 아니 심적 고통은 우울증을 포함한다. 고인의 은행거래 현황을 보니 경제적 어려움이 그 사유는 아니었던 것 같았고, 아마 우울증이 아닐까 싶은 게 당연한 의식의 흐름이었다.


그리고 가족관계증명서에 선명히 보이던 중학생 나이의 아들. 설마 아직 중학생인 아들이 엄마의 죽은 모습을 보진 않았겠지...? 하는 인간적인 걱정이 순간 스쳐가긴 했지만, 사실 그건 내 업무의 영역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가 알 수 있는 부분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죽은 전 배우자의 상속분 처리를 위해 전 남편이 왜 왔는가가 문제인데,


아마 이혼하면서 양육은 아이의 엄마가 담당했던 것 같고, 고인과 고인의 친정엄마, 그리고 중학생 아이, 셋이 살던 중 사건이 일어난 듯했다. 그리고 어머니의 사망으로 인해 중년 남자와 고인 사이에 있던 미성년 자녀의 친권자 겸 보호자가 아버지인 중년남자가 되어버렸고, 자녀에게 상속된 고인의 재산을 처리할 권한도 이 남자에게 넘어간 것이었다.


우리나라 상속법상 1순위는 직계비속(쉽게 자녀)과 배우자이며, 2순위는 직계존속(부모)과 배우자이다.


친권자는 아버지일지언정, 앞으로 아이의 양육자는 과연 누가 될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이혼하면서 분할한 나의 재산이 결국 이혼한 전남편의 관리 아래 넘어간다는 것. 어떠한 사유로 이혼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인으로서는 유쾌할 수는 없겠거니 했다.


서류상 권리관계는 모두 확인했으니, 이제 전산만 치면 된다. 고인의 이름으로 있던 은행 상품중에 상속이 불가능한 것들(보험 등)은 해지하고, 상속이 가능한 것들은 피상속인인 미성년자 아들 이름으로 넘겨야 했다. 문제는 예금주를 아들로 바꾸면서 새로운 비밀번호를 등록(그전 비밀번호는 고인이 쓰던 번호니까)해줘야 할 때 발생했다.


알뜰하게 살아온 고인에게는 이런저런 예적금이 많아서 예금주를 하나하나 바꾸면서 비밀번호를 두 번씩 눌어야 했는데, 이 중년남자가 한마디 뱉었다.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내용인즉슨 본인 배고파서 밥 먹고 올 테니 비밀번호는 은행원인 나보고 누르라는 것. "네? 제가요?"라고 자동반사로 입 밖으로 튀어나올뻔한 건 간신히 막았고, "비밀번호는 "비밀"번호니 고객님이 "비밀"처럼 혼자 아시는 거라고... 물론 세상에 완전한 비밀은 없지만요"라고, 말장난이라도 해줄 수 없고.


제가 은행원이라 고객님 대신 비밀번호를 누를 수는 없고, 고객님이 누르셔야 한다고 말하고, 고객님을 붙들어 마저 절차를 처리했다. 이건 은행원으로서의 나의 마음을 이유를 알 수 없게 불편하게 했다. 내가 이게 돈 받고 하는 일이긴 한데 너로 인해 땀 삐질거리며 일하는데 밥 먹으러 가겠다는 거니? 하는 마음이었으려나...


고인이 된 여자는 성실히 살아온 것 같았는데, 이런저런 저축보험이니 변액보험을 들어놓기도 했고, 한때는 자영업자였던지 노란 우산공제도 있었다. 투자상품도 몇 개 있었고 예금도 있었다. 남자가 연봉 1억 이상은 거뜬한 전문직이었음을, 이 남자도 당행 거래가 있어서 자연히 알게 되었다. 설마 아이 몫의 죽은 전아내의 재산에 손은 대진 않겠지, 돈 잘 번다는 전문직인데 설마 중학생 자녀를 모른 척하진 않겠지, 쨋든 아이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가능성이 크게 높지 않아 한편으로 다행스럽기도 했다. 손은 바삐 움직이면서도 머릿속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흘렀다.


내가 기계적으로 전산을 처리하는 한 시간 넘게, 배가 고프다는 중년남자는 같이 온 젊고 예쁘장한 여자와 이야기를 나눴다. 대화의 내용으로 봄직하니 그 여자는 새로운 아내인 것 같기도 하고, 애인인 것 같기도 했다. 어찌나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고, 크게 웃고 떠들던지, 비밀번호 키패드에서 흘러나오는 "비밀번호를 눌러주세요" 소리는 잘 알아채지도 못해서 다시 한번 내가 "비밀번호..."라고 말해준 적이 몇 번이었다. 그리고 이런 상황은 인간으로서 나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전아내의 자살, 본인 자녀의 엄마라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 죽어서 대신 상속처리를 하러 오는데 현재의 아내 혹은 애인과 오는 것은 그래 그럴 수 있지. 휴가를 내고 왔다면, 은행업무를 다 보고 데이트를 할 수도 있거니까. 그런데 이렇게 웃고 떠드는 게 맞는 걸까. 왜 이혼했는지,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유책배우자가 누구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설령 아내가 유책배우자였다고 해도 이게 맞았던 걸까.




여하간 기나긴 상속절차 후 중년남자와 젊은 여성이 떠나고 다시 쉴 틈 없이 고객들이 왔다 가고 마감시간.


내 서류를 결재하던 부지점장님이 같이 온 여자는 누구였냐고 물었다. 수습행원인 나로서는 업무처리 전에 규정을 확인하려고, 부지점장님께 서류를 검토받았었기 때문에 이 남자와 고인의 관계, 이 남자가 왜 온 건지는 그분도 알고 있었다. ”모르겠어요 재혼한 아내? 아니면 애인?인 거 같더라고요. “


전형적인 수다쟁이 아줌마 같던 부지점장님은 "아니 그러면 자살한 전 아내 재산 상속처리하는데 새 아내랑 온 거야???" 하고 큰 소리로 한마디 했고, 이는 남편이 있고 어린 자녀가 있던 나의 선배들의 공분을 불러왔다. 중년 남자에 대한 분노는 곧이어 고인과 중학생이던 고인의 아들, 그리고 어린 손자를 홀로 키워야 하며, 딸을 먼저 떠나보낸 할머니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이어졌다. 내 딸이 알뜰히 벌 어모은 재산을 다룰 권리가 이제는 남보다 못한 전 사위에게 넘어가는 황당함도 할머니의 몫이었다.


"어휴 죽긴 왜 죽는데, 이 여자는 죽을 때 자기 재산이 남편에게 넘어갈 건 알고 죽은 거야?"


이 부분이야 말로 선배님들의 가장 큰 분노를 불러일으킨 포인트였다. 어째서 이혼했는지 누가 유책배우자였는지, 이 상속이전에 관해서 우리로서는 알턱이 없었지만, 왠지 남자가 유책배우자였을 것 같다는 느낌과 함께.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는 나는 사실, 현재 남편들과 당신들의 이야기를 빗대어 가며 이야기하는 선배님들의 대화에는 낄 수 없었다.


대신 자살이니 호상도 아닐 것이며, 어머니가 살아있는데 자식이 먼저 갔으니 더더욱 악상이어서 분명 쥐 죽은 듯이 조용했을, 중학생 아들을 상주로 세울 수도 없어서 상주 없이 영정사진 하나 놓여있을 만한 상갓집, 아니 자살이어서 차려지지도 않았을 수 있는 그 여자의 상갓집만 떠올랐다. 물론 손으로는 열심히 시재를 맞추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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