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작은 회개의식
나에게 대출이란 크게 네종류다.
1. 해주고 싶었고, 해줄수 있었던 대출
2. 해주고 싶었는데, 해줄수 없었던 대출
3. 해주기 싫었는데, 해줄수 있었던 대출
4. 해주기 싫었는데, 해줄수 없었던 대출
오늘의 주제는 2번이다.
적금이나 예금이나, 주택청약을 담보로도 대출을 받을수 있다.
애써 목돈을 모았는데, 잠깐 쓸일이 생겼고, 예금이나 적금을 깰수는 없으니 그걸 담보로 대출을 받는것이다.
(만기전에 해지를 하면 약정한 이자를 다 받을수가 없다)
특히 장기가입 및 납부를 해야지 1순위가 되는 주택청약은 쉽사리 해지를 하지 못하기 때문에 담보로 대출을 받는 경우가 꽤 많다.
만기 리스트를 살펴보다 보면, 주택청약 하나에 10만원씩, 20만원씩 예적금 담보대출을 열개이상씩 받는 사람들이 꽤 자주 보인다.
예를들면, 2백만원 들어있는 주택청약에 10만원 짜리 담보대출이 18개가 걸려있다던지 하는...
예적금을 담보로 대출받는건 고객 마음이지만,
이렇게 대출을 많이 받아버리면 약정이자보다 대출이자가 훨씬 더 많이 나오기 때문에 과연 이게 현명한 선택인가 하는 것은 항상 의구심이 들었다. 이럴바에야 그냥 해지하고 대출안쓰는게 더 이익이 아닌가 하는...
물론 그렇다고 고객한테 이럴바에야 해지를 하시는게, 라고 도넘은 소리를 하지는 않는다.
언론에서 하도 연봉 1억이라고 떠들어대는 위치에 있다보니,
괜히 고객의 심기를 건드리는게 될수있으니까 말이다.
어느날 20대 후반의 젊은 남자가 왔다.
"신용대출을 받고 싶은데요" 와 "제가 신용대출을 받을수 있나요"는 다소 미묘한 차이가 있다.
왠지 후자의 멘트를 꺼낸 고객한테 마음이 더 간다.(물론 내 마음이 더 간다고 해서 뭐 달라지는건 없다)
그 젊은남자는 "제가 신용대출을 받을수 있나요"라고 물어왔다.
이 말의 속뜻은 대부분, 이미 대출을 좀 쓰고 있어서 본인이 생각할때도 대출이 더 나오지 않을것 같다는
겸손(?)과 약간의 포기의 뜻인경우가 많다.
"어디에 쓰시려는데요?"
"아버지 병원비가 필요해서요"
미용실에 가서 "바람펴서 헤어진 전남친 결혼식장에 갑니다"라고 말하면 원장님을 불러온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부모님의 병원비라니, 뭔가 은행원으로서 대출을 꼭 해주고싶어지는 자금용도임에는 분명했다.
그 친구가 가져온 등본에는 어머니가 없었다.
대출심사를 돌려봤다.
타은행에서 주택청약담보대출을 10만원, 20만원씩, 20건은 넘게 쓰고 있었다.
학자금 대출이 있었다, 이미 당행에서 신용대출을 쓰고 있었다, 전세자금대출도 쓰고있었다.
내가 너무 많은 상상을 하는걸수도있다.
등본에는 어머니가 없었고, 전세자금대출은 20대 후반의 대학생으로 보이는 그 친구의 이름이었다.
10만원 20만원씩 끊어져있는 예담대는 거진 생활비일것 같았다.
그 와중 카드론이나 현금서비스는 없었고, 2금융권 거래도 전혀 없었다.
대출은 안나왔다. 대출이 안나오는 이유를 설명했다.
"신용대출은 거의 연봉정도가 한계라고 보시면 되고, 우량기업에 재직하시는 경우에도 아무리 잘나와도 연봉의 150%가 한계라고 보시면되는데, 지금 학자금대출을 포함한 신용대출이 이미 연봉의 2배 수준이셔서 신용대출은 더이상 불가하세요"
"전혀 방법이 없나요?"
"네 그 신용대출은 제가 한도를 부여하는게 아니라, 고객님의 정보를 가지고, 전산에서 한도산출이 되는거라서요. 제가 어떻게 해드릴수 있는게 없어요"
"그럼 저는 2금융권으로 가야하나요?"
고객들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중 하나가, 2금융권 대출 쓰지말라는 이야기다.
카드론, 현금서비스, 저축은행, 캐피탈,
금리가 높아서 이자부담이 크기도 하지만,
거래기록이 남으면 점수에 악영향을 쉽게 주기도 하고,
그렇다고 그 대출을 다 갚는다고 해서 한번떨어진 신용점수가 한번에 회복되지도 않고,
점수가 일정선 이하로 떨어져 버리면, 은행에서 대출 심사받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럼 저는 2금융권으로 가야하나요?"
"제가 은행원으로서 손님한테 2금융권으로 가시라는 말씀을 드릴수는 없는데, 일단 저희 은행에서 대출은 더 이상 안되십니다"
얼핏봣으면 대학생이겠거니 하고 생각이 들었을법한 그 젊은 남자는 병원비를 구하지 못한채 돌아갔다.
사실 나는 예담대를 10만원 20만원씩 끊어서 받는게 좋아보이진 않았다.
.
20대 초중반 남자고객들이 적금이나 청약을 들고는 몇번 열심히 납입을 하다가,
10만원 20만원씩 대출을 받아 쓰고는 군대를 가버렸다.
그리고는 그 대출과 적금은 방치되고, 대출은 연체가 되고, 군대에 가버려서 연락은 안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래서인지 그 쪼개고 쪼개서 받은 예담대들은 나에게 마치 연체차주의 상징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대출심사를 하려고 본 그 친구의 부채현황에서 20건이 넘는 예담대들을 본 순간,
이건 마치 생활력의 상징같기도하고, 구구절절한 삶의 기록같기도 한것이.
아 내가 틀렸구나, 그간의 나의 생각은 편견이었구나. 하는 부끄러움이 떠올랐다.
그 친구가 가고, 어쩐일인지 내내 손님이 없었고,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머리에 떠올랐다.
"사잇돌중금리"
사잇돌중금리는 신용등급만 양호하고, 적정소득이 있다면, 신용대출 한도가 초과되더라도 한도가 나올수도 있는 대출이었다.
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런저런 대출이 있는데 저도 자주하는 대출 상품이 아니다보니 아까는 생각이 안났고,
모바일로 신청해보시라고 말했다.
나의 편협했던 생각에 대한 나만의 아주 작은 회개의식같은것이었다.
그날 퇴근을 하면서 그 친구의 대출 승인기록을 봤다.
사잇돌 중금리는 자동부결이었다.
2금융권은 넉넉한 곳이니 그 친구는 거기서 아버지의 병원비를 구했겠지?
병원비를 구한것은 다행일테지만, 그렇다고 잘된일이라고 쉽사리 말하지도 못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