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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행생활자 Oct 31. 2022

드디어 왔다 카-렌다의 시즌

달력 그냥 1천원에 팔면 안될까?

10월 중순의 일이다.

"카렌다 나왔나요?"

"아뇨"

"저희도 아직 몰라요. 공문도 뜨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말 거짓말 처럼 그날 5시 카-렌다(a.k.a 달력)이 지점으로 들어왔다. 원래 11월 초중순은 되야 달력이 들어오는데 말이다. 나의 은행 3년 짬밥 따위야 달력을 못해도 30년은 받아오신 할아버지 한테 비빌바는 아니구나 싶었다. 근데 이제는 달력 그냥 제발 1천원에 팔면 안될까?




지점마다 달력 교부방식이야 다 다를 텐데, 나의 첫 점포는 인당 xx개씩 배분해주고, 본인이 응대하는 고객들에게 1개씩 주기로 했었다. 그렇게 넉넉히 이틀이면 모두 소진되었다.

내 선배님의 마지막 고객이자 그날의 마지막 고객에게 달력 하나를 드리자, 그 분은 달력을 1개를 더 달라고 했고, 그 선배님은 "인당 1개가 원칙이고, 오늘이 두번째 날이라 모두 소진되었다"고 말했다.


아주 정확히 말한다면 일반적으로 내점하는 고객들에게 드리기로 배분된 양이 소진된거고, 크게 거래하는 법인에 줄것들이나, VIP 고객들용은 따로 빼놓는다.


여하간 선배님의 저 말이 끝나자마자, "나를 괄시해서 하나밖에 안준다" "그 많은 달력이 똑 하고 내앞에서 끝나는게 말이되냐" "돈많은 사람들 줄꺼 빼놓지 않았냐 하나 빼서 주면안되냐" "지점장 나와라" 를 거짓말 안치고 30분 동안 무한 반복했다.


영업시간도 끝난지 오랜데, 보다못한 부장님이 당신이 지점장님인척 나서서 본인차에 거래처 인사용으로 들고다니시던 달력이라도 꺼내드리겠으니 저희 직원한테 심한말은 삼가달라고 했고, 문제의 고객은 "거 가져올거면 두개 가져와요" 라는 말로 듣고있던 우리의 얼을 다빼놓았다.


그리고 그녀는 달력을 야무지게 총 3개 챙겼으니, 쇼핑백도 3개 챙겨 유유히 객장을 떠났다.


집에가서 자녀들에게 자랑했을까? 남들 다 1개씩 받아오는데 나는 은행원한테 큰소리 버럭버럭 쳐서 3개 받았다고,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했을까? 나는 VIP 라서 3개 받아왔다고. 근데 대체 그거 쓰긴 하는건가요?




내가 볼때 진정한 은행원이라면 카-렌다와 관련된 잊지못할 추억 하나쯤은 있을 것이다. 아니 그런 잊지못할 추억 하나쯤은 있어야 진정한 K-은행원이라고 할수있다.


작년 12월인가 나에게 왔던 고객님은 이미 달력 소진이 끝난지가 언젠데, 달력을 달라고 하셨다. 이미 저번달에 다 소진되고 없다고 하니, 그럼 내가 쓰는거라도 달라고 하셨다.


당행 달력은 직전년도의 12월부터 나오기 때문에, 당시에 이미 나는 새 달력을 꺼내서 쓰고있던 차였고,

"제꺼는 이미 제가 쓰고있습니다"

"쓰던거라도 줘요"

두손 두발 다들었다. 나는 쓰던걸 그냥 드렸다. 혹시 남이 쓰던 달력이라도 은행달력을 꼭 쓰셔야하는 징크스가 있으신걸까?




"ㅇㅇ아 벽걸이 달력 하나 가져와라"

"싫어 엄마. 내가 왜 집에서 회사 로고를 봐야해 싫어. 딱 싫어"


내가 담당하는 법인에서 나와 같이 업무를 보시는 연배가 우리 엄마와 비슷하신 여자 차장님께 이 이야기를 해드리니,


"그래도 대리님, 어머니가 대리님이 은행들어온 첫해잖아. 딸 다니는 은행 달력 걸어놓고 싶을수있지. 나도 우리딸 은행원 되면 그 은행 달력 집에 한번쯤은 걸고싶을것 같아."

"그래도 전 싫어요 차장님."

"그럼 내가 XX은행(내가 다니지 않는 다른 시중은행) 벽걸이 달력 줄께. 어머니한테 그거 드려. 아무렴 딸이 은행다니는데 다른 은행가서 달력 얻기는 좀 그렇잖아"

"아... 그런가요?"


그리고 그 다음주 차장님은 정말 XX은행의 벽걸이 달력을 가져다 주셨고, 그 이듬해 우리집에는 우리집에서아무도 거래하지않는 XX은행의 달력이 1년 내내 걸려있었다. 그 다음부터 나는 엄마에게 내가 다니는 은행의 벽걸이 달력을 잔말없이 하나씩 가져다 드렸다. 뭔가 은행원으로서의 삶을 받아들이는 메타포쯤 되려나?




대체 누가 시작한 이야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은행 달력을 집에 걸면 돈이 많이 들어온다는 그 말. 난 이 말을 들을때마다 왜인지 모르겟지만, 명절에 관한 유명짤이 생각난다.



은행달력을 집에 걸어서 집에 돈이 많이 들어왔다면, 아마 그렇게 달력을 2-3년 정도 연속해서 건다면, 부자가 되어 은행 VIP가 되었을테니, 더 이상 은행달력 따위는 필요가 없을것이다. 아니 그냥 가시면 알아서 고객님 몫 달력은 빼놓았을텐데...


저 명절썰과 함께 은행달력에 대한 속설은 묘하게 블랙코미디다.




어차피 달력 만드는 비용은 똑같이 들텐데, 정말 필요한 고객들에게만 1천원에 팔고, 기부라도 했으면 좋겠다ㅡ 는 우리의 작은 소망은 올해도 역시나 내년을 기약하게 되었다.


그냥 드리면서 욕먹느니, 1천원 받고 드리면서 욕먹을란다. 달력 1천원에 팔면 안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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