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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행생활자 Oct 04. 2022

당신이 나에게 대출을 신청할때 내가 알수있는 것들

알고 싶지 않아도 눈에 보여서 알게되는 것들

나도 남의 인생에는 큰 관심이 없다. 큰 흐름에도 관심이 없고, 작은 물줄기에도 관심이 없다. 그리고 관심을 가질 틈도 없다. 보기보다 은행원들은 꽤 바쁘다.




나보다 두세살쯤 많은 남자가 주담대(주택담보대출)를 신청하고 싶다고 왔다. 재태크에 관심이 많은 남자였던건지 두번 방문하기 싫었던 건지, 대출 신청시 챙겨와야 하는 서류를 착착착 아주 잘 챙겨왔었다. LTV니 DTI, DSR이니 나도 머리아픈 것들을 열심히 공부해온 사람이었고, 간이 계산기로 본인 소득과 부채를 돌려보니 본인은 분명 처분조건으로 주담대를 신청하면 나올거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대출 신청서와 신용정보 제공 동의서를 받고 승인 나면 연락드리겠다고 하고 상담은 마무리했다.


그 남자의 예상대로 대출은 아무 문제 없이 승인이 났다.




2주일 있다가 그 손님은 약정서를 쓰러왔다. 약정서를 다 쓰고, 대출에서 중요한 내용에 대해 설명도 하고, 궁금한거 있으시면 물어보시라고 하고, 꽤 오랜시간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궁금한게 생겼다. 

'이 분 사투리를 안쓰시네?'

뭐 하나 물어봐도 되냐고 여쭤보니, 오케이를 하셔서 여쭤봤다 

"대구 사투리 안쓰시네요? 남자분들은 30년 가까이 사시면 사투리를 못 바꾸시던데..."

당황한 표정이 나에게 굉장히 귀여우시다는 인상을 주셨는데, 본인이 대구 출신이라는걸 어떻게 알았냐며 오히려 나에게 물었다.


"저한테 주민등록초본 주셨잖아요. 계속 대구광역시던데요?"


내가 남의 고향이나 알고 싶어하는 호사가라서가 아니라 그냥 나는 내가 대출 심사시 보는 순서대로 서류를 정리하고, 한번 쓱 보는 습관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35년 짜리 대출 나가고 더는 볼일없는 사람의 고향을 알고싶어하지도 않는다 나는.


"아... 저는 사투리 쓰는 사람이 있어야 사투리를 써요... 근데 그럼 대리님은 저에 대해 뭘 또 아시나요?"


나는 이 사람에 대해 알 수 밖에 없는 것이 참 많았다. 공교롭게도 이 사람이 나온 대학교가 당행을 거래하는지, 그래서 이 사람의 과거 정보에는 대학교와 전공이 등록되어있었었다. 대학교와 전공을 알수있었다.


건강보험 자격득실확인서도 기존 내역을 모두 포함해서 제출해서 이 남자의 부모님 중 한 분(대부분 아버지겠지)의 직장도 알수있었다. 이 남자는 독립할때까지 아버지의 피부양자였으니까. 대학을 휴학하고 인턴을 한건지 어떤 회사에서 직장가입자로서의 기록도 몇개월치 있었다. 그럴듯한 인턴말고 이런저런 알바도 했던건지 직장가입자였다가 탈락되었다가의 기록도 꽤 있었다.


미혼임을 확인하기 위해 받은 가족관계증명서에는 부모님 성함과 형제의 이름도 있었다.


개인의 성향에 따라 절친에게도 공개하지 않는 내 기준 최고의 민감정보인 연봉도 나는 알 수 있었다. 재직증명서를 받으니 언제 입사했는지도 알수있었다.


아 그리고 주민등록번호도 핸드폰 번호도, 현재의 집주소도, 향후 살게될 집주소도, 부채현황도 신용점수도 알수있었다.


물론 내가 아스퍼거 증후군도 혹은 전세계 최상위권의 기억력 소유자도 아니고, 이 모든 것들을 외우지도 않으며 그럴 필요도 없고, 나는 고객이 주신 서류 뭉치에서 대출 심사에 필요한 것들만 투입하고 심사를 할뿐이다.




"이거 너무 정보불평등 아닌가요? 제가 대리님에 대해 아는건 이름하고, 회사번호 밖에 없는데요?"


공격적인 말투는 전혀 아니었고, 굉장히 흥미롭다는 말투였다. 애초에 공격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으로 보였다면 사투리 이야기 따위는 내가 애초에 꺼내지 않았겠지.


"고객님이 제 연봉하고 가족관계를 아셔야 하는건 아니니까..."라고 말끝을 흐리니 또 굉장히 사람좋게 웃으면서 "하긴 그렇네요" 라며 바로 수긍하셨다.




이쯤되니 사투리 쓰는 사람이 있어야 사투리를 쓰는, 나보다 나이가 두세살 많은, ㅇㅇ대학교 ㅇㅇ학과를 나와, ㅇㅇ회사에서 일하는, 연봉은 얼마고, 이제 곧 집도 한채 생기는, 그리고 나의 쓸데없는 질문과 이야기도 사람 좋게 받아주는 이 남자분이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궁금해졌다.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는 페이퍼로 알수있는 문제는 아니니까. 


안다고 뭐 달라지겠냐만은 말이지... 


나는 이 날 하루, 그리고 이 사람 좋은 남자의 대출이 나간 하루, 그가 여자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무척이나 궁금해했었었다. 그리고 지금은 이름도, 생년월일도 어떤 인적사항도 생각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다들 은행원이 나의 개인정보를 기억할까봐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것 같다. 한순간 괜찮다고 생각했던 이성의 인적사항 조차도 전혀 생각나지 않으니까. 이런걸 다 기억하기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인적사항이 나에게 매일 쏟아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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