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씨 그래서 은행 다니겠어?"
지갑이나 가방 등을 일부러 벤치 같은 곳에 떨어트리고는 주워가나 안 주워가나 보고, 역시 사람들이 찾아가지 않았다 혹은 경찰에 신고했다는 결말로 이어지는 "국뽕" 컨텐츠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 하지만, 한국 사람들은 분명 "대부분"정직하다. 아니 일단 나는 그렇게 믿고 있고, 믿으려고 한다.
신입 때 개인 업무 창구에서 가장 하기 부담스러운 업무를 꼽으라면,
첫째가 상속이요, 둘째가 처음으로 보내는 해외송금이었다.
일단 상속은, 상속자 체도 규정상 확인해야 할 것이 많다. 그리고 감사하게도 고인이 당행과 거래가 많으시면 단순 입출금통장에, 신탁에, 보험에, 펀드에, 대출에... 정리하기도 참 벅찼다. 돌아가신 지 한참 되셔서 오시는 경우에는 가족을 잃은 슬픔이 그래도 다소 누그러져서 한편 다행이기도 했다. 그런데 가져오신 서류에 사망일자가 채 한 달도 되지 않은 경우에, 오신 가족분들은 몸도 마음도 힘드실 텐데, 나는 신입이라 빨리 해드리고 싶어도 해드릴 수가 없는데, 자꾸 전산은 막히고, "제가 해놓을 테니 어디 가셔서 커피 한잔 하고 계세요"라고 말할 수도 없고, 땀만 삐질삐질 흘리면서 업무를 처리하곤 했다. 그리고 또 상속 업무를 보러 오시는 고객들은 그날 하루 딱 맘 잡고 모든 서류를 챙겨서 고인이 거래하는 모든 은행을 도시는 거라 내가 빨리 처리해 드려야 했는데 내 마음과 내 손과 은행 규정은 한참 따로 놀곤 했다.
그래도 한결 나은 건, 해외송금이었을까? 싶지만 그건 또 아니었다. 이건 또 외국환거래법이 걸려있었고, 받는 분이나 보내는 분의 정보가 틀리게 되면 입금 지연이 되거나 내용 변경 전문이 나가야 하니 역시 해외송금도 신입에겐, 아니 적어도 나에겐 부담스러운 업무였다.
입행한 지 두 달쯤 되었을 때인가, 마감이 가까워진 시간에 중년 여자분 한분이 송금 3건을 보내러 오셨다. 한창 신입이었던 나는 송금 2건을 임시 저장 상태로 완료하고, 마지막 한건을 처리하던 중 앞의 2건에 송금인 정보가 틀린 걸 알게 되었다. 마지막 한건은 일단 송금인 정보를 정확히 넣고 완료, 첫 번째+두 번째 건은 임시저장상태에서 다시 정보를 변경해서 완료. 그리고 그 여성분께는 이러저러해서 취소를 했고 제가 다시 완료했습니다 오래 걸려 죄송합니다 하고 현금을 받고는 거스름돈을 돌려드렸다. 그런데 중년 여성분께서는 3건 송금하려고 돈을 ATM에서 맞추어서 뽑아왔는데, 돈이 이렇게 많이 남을 리가 없다, 다시 확인해봐라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아주 기본적인 업무를 틀린 게, 속된 말로 X 팔렸던 나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하고 고객님을 보냈다.
그분께서는 마지막에 가시면서도 "지금 아가씨가 준 거스름돈 내가 이 봉투에 그대로 다 넣었으니까 돈 틀리면 전화해요. 내가 지금 해외출장 갔다가 방금 와서 너무 피곤해서 일단 갈게"
역시는 역시였다. 마감하는데 290여만 원이 부족했다. 심지어 그 송금 건으로 틀리리라 생각도 못한 나는 다른 전표만 뚫어져라 보고 있었는데, 옆자리 대리님이 "너 이거 아니니?" 하고 단박에 찾아내셨다. 멍청하게도 임시저장상태에서 정보 변경 후 완료한 2건에 대한 현금을 받지 않은 것이다. 그 송금 두건에 받아야 했던 현금 액수를 더해보니, 딱 내가 부족한 돈과 원단위까지 맞았다.
참고로 은행원은 내 시재(현금)가 안 맞으면(전산에 있는 돈과 현금 실물로 존재하는 돈이 다르면) 무조건 찾고, 메꿔야(전산과 현금 실물이 맞게 만들어야) 집에 간다. 남으면 남는 대로 문제고,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문제여서, 부족하면 내 돈으로 메꾼후에 퇴근을 할 수 있다.
돈 부족하면 전화하라는 말씀까지 하셨으니, 돈을 안 주실까 하는 걱정은 한편 내려놓고 급히 전화를 드렸는데 "아가씨 내가 그럴 줄 알았어 내가 돈 더 받아야 한다고 했잖아. 내가 지금 어딨냐면... 아니 근데 아가씨 차는 있어요?" 제가 차가 없습니다...라는 말에 "알았어요 좀 기다려봐요. 내가 갈게"
그 중년 여자분은 30분 만에 오셨다. 그리고 본인이 송금하려고 5백만 원 뽑았었다는 말씀을 해주셨고, 이번에는 내가 빠지고 옆자리 선배님이 송금한 돈과 부족한 돈과 있어야 할 돈을 이래저래 맞춰주셨다. 역시나 내가 돈을 그것도 3백만 원에 가까운 현금을 주신다는데도 극구 사양하고 손님을 돌려보낸 탓이었다. 정산이 끝나자마자 차장님은 금고에서 사은품 중 그나마 젤 쓸만한 친구(세제와 주방용품 버라이어티팩)를 하나 가져오셔서 내 손에 쥐어주시면서 빨리 드리라고 하셨다. 그래 봤자 3백만 원에 비하면 별거 아닌 사은품을 받으시면서 "아가씨 그래서 은행 다니겠어?"라는 말씀을 한마디 남기시고는 사장님(3백만 원을 돌려주셨으니 나에게는 사장님이고 사모님이시다)은 사라지셨다.
그 후로 개인 업무를 떠나서 대출계에 있을 때도, VIP 담당을 할 때도 객장에서 그 사장님은 어찌나 내 눈에 잘 보이던지, 후광이랄까... 대기가 많아서 너무 많이 기다리셔야 하는 날이면 나는 대출담당 직원이었지만, 내 자리로 안내해서 송금을 먼저 처리해 드리기도 했고, 나 또한 너무 바쁜 날이면 오늘은 업무처리를 먼저 해드릴 수 없겠다고 말씀드리면서 항상 인사를 드렸었다. 내 마음속의 항상 VIP 셨다. 아, 인사멘트는 항상 "사장님 덕에 아직도 은행 다니고 있습니다"였다.
내가 항상 사장님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가 단순히 돈을 다시 돌려주셔서, 은행원 표현으로 내 돈을 박지 않게 해 주신 감사함 때문만은 아니다. 물론 가장 중요한 이유긴 하지만 말이다.
첫째로, 나는 사람이 싫어질 때면 사장님 얼굴을 떠올린다. 아무리 봐도 아가씨가 돈을 덜 받은 거 같으니 돈 부족하면 연락하라는 말도 떠올린다. 이렇게나 많이 떠올렸으면 닳고, 옅어질 만도 한데, 나에겐 마르지 않는 샘 같은 기억이다. 어느 날이던 사장님 생각을 하면, 사람이 싫어지던 마음이 한결 누그러진다. "사장님 같은 분이 있잖아"
둘째로, 우리 부모님께 나의 직업을 들키지 않게 해 주신 점에 감사한다. 한 달치 월급밖에 못 받았던 상황이라 내 통장에는 돈이 정말 몇십만 원 밖에 없었다. 사장님이 바로 오셔서 돈을 돌려주지 않으셨다면, 그날 마감을 위해 나는 부모님께 전화를 했었어야 했고, 우리 부모님이 부족한 3백만 원을 내 통장에 쏴야 하는 상황이었다. 3백, 쏠 수 있는 돈이었지만, 근데 그러면 나의 부모님은 당신의 딸이 돈 실수할 때마다 자기 돈을 박아야 하는 슬픈 운명을 지닌 직업에 종사한다는 사실을 알게 될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그걸 딸을 자랑스럽게 은행에 취업시킨 지 두 달 만에 말이다.
이 일이 액수 기준으로는 가장 큰 에피소드였지만, 그 외에도 인간에 대한 믿음을 쌓아 올릴만한 일도 많았다. 돈을 더 드려서 폭풍우에 우산을 쓰고 찾으러 갔는데, 당신이 애기가 셋이라 가져다줄 수가 없었다, 비 오는데 고생했다며, 봉투에 주스에 과자에 초콜릿을 담아서 주던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아 보인 애기 엄마도 기억이 나고.
아 물론, 모든 사람들이 내 마음 같진 않았다. 내 잘못으로 고객으로부터 돈을 받지 않아서 은행 전화로 전화를 드리니(지역번호로 시작한다) 내내 전화를 안 받으신 분도 계셨다. 30분을 기다리고 내 핸드폰으로 전화드려, "ㅇㅇ은행입니다"하니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돈 안 받은 건 그쪽이시잖아요" 하셨었다.
이제는 내가 그 지점을 떠나서, 또 그때 나랑 같이 일하던 모든 직원이 그 지점이 아닌 다른 지점에 근무해서, 아직도 사장님이 당행을 거래하시는지는 잘 모르겠다. 코로나가 터지고 나신 이후에 보이지 않으셨는데, 외국에서 물건을 떼다 한국에서 파시는 일을 하시는데 이제는 인터넷에서 해외송금을 보내시는 건지, 아니면 코로나 때문에 일이 줄어드셔서 은행에 잘 오지 않게 되신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그래도 이렇게 살아오신 분이시니 하시는 일 큰 어려움 없으시지 않을까 멀리서 생각해 본다. 착한 사람은 복을 받아야 하고, 내 짧은 은행 인생에선 이분이 가장 착하고 정직한 분이셨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