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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행생활자 Jan 19. 2022

은행에서 일하면 돈 많은 사람을 많이 볼 줄 알았지

돈은 맨날 보는데, 돈 많은 사람들은 못 만나는 아이러니란

은행엔 돈 투성이다. 종이 띠지로 백장씩 묶여, 비닐로 쌓인 걸 보고 있으면, 저게 바로 사람을 죽이고, 살리고, 웃고, 울리는 돈이라는 요물인가 싶기도 하다. 매력적인 사람들이 스스로가 매력적이기 때문에 관심을 갈구하는 눈빛을 쏘아대지 않고, 그저 무심히 존재할 뿐인 것처럼 돈도 겨울엔 한없이 춥고, 여름엔 한없이 더운 철제금고 안에 무심하게 쌓여있다. 명품백은 백화점 가장 명당자리에, 시즌마다 바뀌는 인테리어와 가장 밝은 조명을 받으며 놓여있지만, 돈은 그런 것들이 필요 없다. 좋은 자리에 진열하거나, 좋은 조명을 비춰주지 않아도 어떤 꾸밈이 없어도 우리 모두는 그게 귀한 줄 안다. 어떤 가치를 지니고 있는지도 안다.


아참 은행에는 수표도 있고, 외국 돈도 있다. 금괴... 아니 골드바를 팔기도 하니 어떤 지점에는 골드바도 금고에 있을 테다. 금은 원화보다 강력한 돈이고 말고.




지극히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나는, 처음 입행할 때 "은행에서 일하면 돈 많은 사람 많이 보겠지?"라는 맑고 순수한 생각을 갖고 있었다. 3년 은행생활에 지점에서 개인금융 / 개인대출 / 법인대출 / VIP 모든 업무를 다해본 흔치 않은 막내 행원으로서, VIP 쪽을 빼고는 은행에서 돈 많은 사람을 보기는 하늘의 별따기이다. 그 와중 젊은 VIP 고객들의 금융자산은 점점 더 증권사나 가상화폐로 옮겨가고 있는 데다가, 기존 VIP들은 대부분 고령층이니 앞으로 은행에서 부자, 젊은 부자를 보기란 더 힘들어질 것 같다.


입행하고 얼마 후부터 하게 된 생각은 돈이 많으면 은행에 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은행에 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내가 일하던 지점과 거래하시던 "회장님" "대표님"들은 은행에 오지 않으셨다. 오너의 하루는 바쁘기 때문에, 그들 개인의 대출과 그들이 운영하던 법인의 대출을 연장할 때면. 매체에서 그렇게 떠들던 "연봉 1억"의 차장님들께서 서류를 꾸려 친히 방문하시고, 서류를 받아 나에게 전달해주시곤 했다. 그 덕에 나는 그 수많은 대출을 연장하면서 "부자들을 보는 꿈"을 이루진 못했다. 일 년 간 내가 만난 것은 법인의 직원들이었지, 법인의 대표가 아니었다.


그리고 언제나 아쉬운 것, 부탁할 것 있는 사람이 찾아가는 거 아닌가, "목마른 사슴이 우물을 찾듯이" 아쉬울 것 없는 오너들은 은행에 방문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아쉬운 건 은행원들이었지.


은행에서 내가 만나는 고객들은 대부분 부자가 아니다. 아, 그건 그렇지 부자란 흔하지 않으니까. 하여간 "나 부자요" 하고 떠들며 여유로운 미소를 띠고 오는 사람은 없었다.


만면에 고민과 걱정을 띄고 오는 경우가 10명 중 5명이고, 이러저러한 이유로 와본 경우가 3, 금리 쇼핑하러 온 경우가 2.

그 만면의 고민을 띈 사람들은 정말 돈이 필요한데 생각보다 안 나오는 심각한 문제에 당면한 사람들이었지, "20억짜리 상가 경락받았는데 10억은 현찰로 준비되어 있고 10억만 대출 좀요." 하는 상대적이며, 절대적으로 배부른 고민은 50명에 1명쯤 되려나? 아 이경우는 금리 쇼핑의 케이스에 포함시켜야 하나?


그 와중 주택담보대출도, 전세자금 대출도, 신용대출도 비대면이 가능해졌다. LTV가 40인 이 판국에 집값의 60%를 자기 자금으로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도, 매매가에 육박하는 전세 보증금의 20%만큼이라도 스스로 마련할 수 있는 사람들도, 우량한 직장을 다녀서 신용대출이 비대면으로 가능한 사람들도 은행에 오지 않으니. 정말 앞으로 은행에서 일하면서 부자를 만나기란, 아니 평균소득 이상의 고객들을 직접 만나기란 점점 더 어려워질게 뻔하다.


내가 창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고객들은 1 금융권의 문턱이 높은 사람들이다. 쉽게 그 문턱을 넘은 사람들은 더 이상 지점에 올 필요가 없고, 넘어서야 하는 사람들이 와서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는 짜증을 감수할 뿐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아주 젊은 여자 국어 선생님이 학교에 부임하셨다. 첫 부임이셨는데, 한 학기가 넘어 수능이 점점 가까워지는 어느 날 선생님께서는 이런 말씀을 하셨다. "의대생인 친구를 만났는데 말이야,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 의사보다 교사가 좋은 직업이래. 교사들은 자라나는 새싹인 학생들을 보는데, 자기는 맨날 병자만 보고, 아프다는 소리만 듣는다는 거야. 그 친구한테 너네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 병자나 고3이나..."


30살이 넘어 은행 창구에 앉아 만면에 돈걱정을 띈 사람들을 마주하면서 생각하게 된다. 고3 만의 그 무거운 공기를 매번 마주하는 게, 26살쯤 되었을 그 선생님께 얼마나 어려운 일이었을지. 그래도 정말 먹고살 걱정하는 고객들과 마주 앉는 나보다는 그래도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가끔은 해본다.


은행원들은 왜 그만두지 않을까, 아니 왜 그만두지 못할까. 그래도 MZ세대는 그 전 신입들 보다 많이 그만둔다지만, 신입을 지나, 과장이 되고, 차장이 되어서도 은행원들은 잘 그만두지 않는다. 더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일이 편해지는 구조여서일까, 아니면 연초만 되면 떠들어대는 24개월 36개월치 월급을 주는 희망퇴직만을 기다리며 원기옥을 모으기 위해서일까, 대기업들처럼 잘라내는 구조가 아니어서 일까.


다 맞는 말이겠지만, 친한 선배에게 항상 이야기했었다. "돈 걱정하는 사람들의 낯빛을 누구보다 잘 아니 그만두지 못하는 거예요"라고. 그리고 선배와 나는 둘이서 나란히 은행에 다니고 있다. 돈이 많아서 좋은 점이 무엇인지 느끼고 싶을 때는 백화점에 가야 한다. 은행에선 돈이 많아서 좋은 점보다는 돈이 없어서 나쁜 점을 더 자주 본다. 은행원들은 돈이 없으면 얼마나 서글퍼지는지를 자주 봐서 못 그만두는 것이 분명하고, 나는 그러니까 두려움을 느낀다. 이곳을 나갔을 때 내가 그 어두운 돈걱정의 낯빛을 내 얼굴에 띄게 될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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