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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영 May 03. 2024

삶의 희비(喜悲)를 끊임없이 기고하는 B에게

너의 글자 하나하나의 공백조차 모두 기억하는 이가 씀

            두 번째 편의 주인공 B는 필자 자신이다. 정확히 말해 성인 이전의 필자이다. 자랑 거린 아니지만, 남들에 비해 다양한 불행과 행운을 경험하며 살았다. 마치 연이은 파도의 연속 같은 삶이었다. 아직은 새벽녘과 같은 나이다. 그럼에도 삶을 포기하지 않고, 또 글을 쓰고 사유하며 살아가는 내가 대견하고, 고맙다.


안녕,

      드디어 너한테 마음을 표현하는 글을 쓰게 되어 기뻐. 지나간 시간 속의 나를 ‘너’라고 칭하는 것도 재밌네. 분명 너도 그렇게 생각할 거야. 최근에 철학에 관련된 팟 캐스트를 들었어. 인간의 세포는 80일 주기로 죽고, 새로운 세포가 탄생한다더라고, 너랑 나는 정신과 기억을 공유하는 전혀 다른 사람이란 거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너를 너라 부르는 게 참 당연하다고 느껴지지 않아? 신기하지.


     사람들 앞에서 괜히 어린 광대처럼 멍청한 소리를 하고, 바보처럼 구는 거 그런 스스로가 네가 되어가는 걸 사회적 자해 행위라며 생각하지도, 그런 널 자책하지 않아도 돼. 너는 최선을 다해서 네가 할 수 있는 만큼 너를 지켜내고 있는 거야. 내가 볼 땐, 그건 가장 성공적인 생존 전략이었어. 그리고 너와 내가 생각해 낼 수 있는 가장 영리한 방법이었어.


        너와 내가 겪은 모든 일을 다 꺼내놓는다면 사람들은 허구라고 느낄지도 몰라. 그래서 들키지 않기 위해, 티 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기억이 닿을 수 없는 곳에 넣어 두었지. 그만큼 많이 아프고 또 아팠나 봐. 너의 마음에 꽁꽁 묻어두고 너 스스로도 잊고 있던 우리의 상처는 아직 네가 감당하기엔 너무나 깊고, 아파. 그래도 걱정할 건 없어, 그 아픔은 조금 더 단단해진, 그리고 조금 더 건강한 지금의 내가 치료하고 있어. 참 이상한 게, 모두에게 내 내면의 상처를 보여주기 싫으면서도, 모두가 다 나에 대해 깊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더라. 지금 너에게는 마음으로 이해하긴 어렵더라도, 지금의 내가 이해하니 다행이지 말이야.


이제 우리가 숨겨둔 기억에 대해 얘기해 보자. 너와 내가 꽁꽁 숨겨두던 그 상처는, 우리가 닿을 수 없는 곳에 넣어 두었던 그 기억들은 살아있었어. 이상하지? 쉽게 말해서 불쾌한 ‘생명’을 가지고 있었어. 우린 그 기억을 닿을 수 없는 곳에 넣어둔 게 아니었어. 우리는 조금의 움직임도 허락하지 않았지. 그래서 나는 너를 위해 그리고 너는 날 위해, 그 기억들이 생매장했어. 그 사실을  깨달은 후, 그곳은 세상의 시간에 비해 터무니없이 느린 시간에 맞춰 부패하고 있었어. 너무 깊숙이 넣어 둔 탓일까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그 일은 기억이 나지 않았지. 우리의 만성적 병 덕분에 완벽하게 망각할 수 있었어. 그건 어느 드라마의 대사처럼 분명히 축복이었어. 하지만 우리가 크게 간과한 거야. 세상엔 완벽이란 건 존재하지 않아. 단 하나도. 그건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인정해야 하는 하늘과의 법칙이지.


너와 내 기억 속에 완전하게 망각된 줄 알았던 기억은 썩은 계란 내음 같은 역겨운 악취를 풍기며 다시 존재를 알려왔어. 당시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나에게 거짓말을 했을 때였지. 상대가 날 속이려 했단 걸 깨달은 난, 모든 장기가 녹아내릴 정도로 열을 냈어. 누군가 내 목을 잡고 기도를 막도 있는 듯한 고통 속에서도 끝까지 고함치면서 상대에게 이야기했지. 그리고 마침내 우리가 숨겨두던 기억 중 하나가 불길한 안녕을 고하며 눈앞에 나타났어. 얼마 남아있지도 않은 힘을 다해 절규했어. 그건 전 애인에 대한 원망 섞인 절규가 아니었어. 정확히 내가 원망해야 하는 사람을 알고 있었어. 그렇지만 내 삶의 이유인 그 존재에게 원망할 자신이 없었어. 결국 난 전 애인에게 원망의 화살을 겨누는 걸 택했어. 당신의 거짓말 하나로 인해 내 삶이 얼마나 처절하게 망가졌는지, 여태껏 너와 내가 열심히 망각해 오던 날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아느냐고 울부짖었어. 완전히 이성을 잃은 상태였어. 그때의 난 인간이 아니라, 괴물이었어. 사실 우린 그 괴물이 되고 싶지 않아, 그 기억이 묻힌 곳 위에서 여태 광대인척 우릴 숨겼지만, 결국 운명은 받아들여야 하는 거였나 봐. 우리가 그 기억을 뭍을 때, 어렴풋이 상상하던 괴물보다 더 악랄한 괴물이 되어버린 거야.


난 아주 잠시 그 괴물을 사랑했어. 우리가 뭍은 기억에서부터 태어난 그 생명체가 나를 잡아먹으려 입을 벌리기 전까지. 순식간에 그 괴물은 날 삼켰어. 괴물의 뱃속에 살며, 그 괴물은 나인 척 살아갔지. 괴물이 나인 척 살아갈 때면, 그 뱃속에서 글을 썼어. 네가 모든 감정을 종이 위에 써놓은 것처럼, 나도 다시 감정과 생각을 놓치지 않으려 애써가며 순간을 붙잡으려고 노력했어. 그러던 중 깨달았어. 글에는 비어있는 공간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야.


사람들은 한 권의 책이나, 문장을 읽을 때 작가가 단숨에 이 글을 작성했다곤 착각하지. 하지만 그 글과 글 사이엔 무수한 공백이 존재하고, 문장과 문장사이에 셀 수 없이 일어나는 일에 대해선 알려고 하지도 알 필요성도 느끼지 못하는 듯해. 넌 아마도 사람들이 너의 글 사이의 공백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 봐 많이, 아주 많이 두려웠었나 봐. 하지만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돼. 난 네가 쓴 모든 글의 공백이 보여 그리고 그 공백마저도 사랑해.


그 공백은 비어있지 않아. 아주 고결하게 그 자리를 채우고 있어. 가득 찬 너와 나의 시간은 더 이상 가엽게 느껴지지 않아. 그리고 다신 우리의 상처를 묻으려 하지도 않아. (괴물을 더 키우고 싶지 않거든,) 병원에도 잘 다니고, 남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오로지 나를 위해 살고 있어. 아직은 종종 내가 괴물이 되는 일이 일어나. 다시 이겨내고, 글을 쓰고 주어진 하루에 대한 감사 하면서 살아. 하루를 가득 채워 살고 미래는 느슨히 흘러가는 데로 계획하고 있어. 여전히 너처럼 성실하지만 너보다 유연하게 사는 어른이지? 지금의 나를 있게 해 준 너에게 고마워. 그리고 잘 잊어줘서, 잘 버텨줘서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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