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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희 Jun 21. 2022

두부

두부 豆腐

어릴 적 아버지께서 늦게 퇴근하시는 날이면 우리 자매들은 저녁을 먹은 후였다. 온 식구가 둘러앉아 먹을 땐 붕어가 네 귀퉁이에 그려진 기다란 교자상에서 먹었다. 아버지의 독상은 동그란 자개 개다리소반이었다. 엄마께서는 눈썹 위로 밥상을 드는 거안제미 대신 안방으로 따뜻한 물이 담긴 대야를 날라왔다. 아버지는 그 세숫대야에 발을 닦으셨다. 그게 언제까지 계속됐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버지 손수 닦으셨지만 세족식 같은 장면이었다. 그리고는 밥상을 받으셨다. 일찍 저녁을 먹은 우리 자매들은 아버지의 상옆에 새끼 제비처럼 기웃댔다.


 아버지의 밥은 보온밥통이 나오기 전이라 뜨뜻한 아랫목에 묻어 놨었다. 아버지 전용 밥주발은 일반적인 밥주발처럼 갸름하지 않았다. 낮지만 더 넓적하게 생긴 아빠다운 밥그릇이었다. 반찬은 갈치구이, 강된장찌개, 불고기, 명란젓, 고등어구이 등이 번갈아 올랐을 것이다. 우리에게 눈치 주는 엄마의 눈길에도 아랑곳 않고 아버지는 새끼 제비들에게 갈치 가운데 살 불고기 등을 넣어 주셨다. 벽에는 일력과 괘종시계가 걸려 있었고 다리 달린 흑백 티브이에선 대통령이 나오는  뉴스가 방영되고 있었다.


 아버지는 이북에서 혈혈단신으로 내려와 경찰이 되신 분이었다. 그리고 엄마와 결혼해서 여섯 명의 딸을 두셨다. 아버지는 반주를 드셨다. 두꺼비나 뚱뚱한 도사가 표주박 든 모습이 그려진 소주를 드셨다. 조그만 소주잔이 아니었다. 파란선이 한 줄 가있던 반불 투명한 커피잔에 한잔씩 드셨다. 언제나 후다닥 밥상을 차리셨던 엄마는 안주로 두부를 내실 때도 있었다. 그것은 가지런히 열을 맞춰 네모지게 썬 두부가 아니었다. 그 옆에 볶은 김치가 가니쉬처럼 올라가 있는 선술집의 두부 안주도 아니었다. 두부 한모를 통째로 넣고 냄비에 펄펄 끓여 데운다. 그렇게 대충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 같은 두부를 접시에 통째로 내셨다. 아주 단순하고 박력 있는 요리 아닌 요리였다.

 

 쪽파를 종종 썰어 넣고 고춧가루와 참기름 깨소금을 뿌린 양념장이 두부 위에 장식처럼 끼얹어졌다. 아버지는 그 두부를 스테인리스 젓가락으로 구석부터 블록처럼 잘라 드셨다. 따뜻한 두부에선 양념장 섞인 고소한 콩 냄새가 났다. 아버지는 양념 묻힌 두부 블록을 제비들 입에 차례차례 넣어 주셨다. 마트에서 시식하는 음식이 더 맛있듯 아버지의 두부 안주를 얻어먹는 게 더 맛있었다.


 두부는 맹숭맹숭한 음식 같지만 실은 숨은 고소함을 지닌 음식이다. 그래서 소박함과 화려함이  공존했다. 서양에선 두부가 살찌지 않는 동양의 치즈라는 별명도 있단다. 두부의 재료도 ‘밭에서 나는 소고기’라는 별명을 가진 콩이다. 동그란 콩이 네모난 두부가 됐는데 그 성격은 각지지도 모나지도 않았다. 두부가 어차피 무른 음식의 대표이긴 하지만 생긴 것처럼 순하다. 순두부도 있지만 그냥 두부만으로도 순하다. 너무 순해서 다른 음식과도 쉽게 친해지고 잘 어울린다. 혼자서도 거뜬히 주연을 해낸다. 그렇지만 조연이나 단역도 마다하지 않는다. 통두부처럼 혼자서도 빛난다. 벌건 고춧가루를 만나 고기 주인공에 뒤지지 않는 두부두루치기가 된다.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에 넣어도 튀지 않고 주연을 받쳐준다. 심지어는 떡국에 두부를 넣는 지방도 있다. 만두소나 동그랑땡에  들어가 부드러움과 접합을 담당하기도 한다.


 지금은 시장이나 마트에서 두부를 산다. 예전에는 골목골목으로  두부를 팔러 다녔다. 그 두부는  종소리와 함께 왔다. 쨍그랑 쨍그랑 소리가 들리면 두부를 사러 나간다. 그러면 리어카에 따뜻한 두부가 면 보자기를 덮고 누워있었다. 그럼 저녁 밥상에 두부 부침을 올리려는 주부, 된장찌개나 김치찌개에 넣으려고 하는 주부들이 그릇을 들고 나왔다.


 교도소에서 출소하면 맨 먼저 두부를 먹는다. 흰색의 순수함처럼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뜻이라는 설도 있다. 교도소에서 단백질 섭취 부족을 만회하기 위함이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콩밥을 먹는다는 교도소로 다시 돌아가지 않기 위해서라는 설이 가장 유력해 보인다. 두부가 된 콩은 다시 콩으로 돌아갈 수가 없다. 오이지가 된 오이가 생생한 오이가 될 수 없듯이 말이다. 두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게 기쁜 일인지 나쁜 일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두부는 모르는 사이에 갱생의 음식이 되었다.


 부모님은 벌써 돌아가시고 우리 자매들도 다 뿔뿔이 흩어져 산다. 하지만 통두부를 볼 때 아버지를 떠올릴 것이다. 냉장고에 가서 어제 사다 놓은 모두부를 끓는 물에 통째로 데친다. 양념간장을 만들어 뿌린다. 살짝 달라진 것은 가쓰오부시 톱밥을 같이 얹어 춤추게 하는 정도다. 알밤 막걸리를 꺼낸다. 마루로 가서 창 앞에 앉는다. 고양이가 따라와 옆에서 식빵을 굽는다. 막걸리를 한 잔 따라 마시고 두부를 주사위처럼 잘라한 입 먹는다. 창밖으로는 벚꽃잎이 날린다. 어린날의 새끼 제비가 화 견주花見酒를 마신다. 식탐 없는 뚱냥이에게 두부를 내밀어 봐도 관심이 없다. 어디선가 오늘의 두부가 왔다는 종소리가 은은하게 들려오는 것만 같다.


#음식수필 #두부 #수필 #봄날의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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