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네모네 꽃이 핀 날부터 / 김승희

내가 중학생 때 암송했던 詩

by 신지후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렇게 신기(神氣)가 오릅니까


죽도록 사랑하면

죽도록 사랑하면

그토록 검은 질료에서

주황빛 신이 불려나옵니까


옛날부터 늘 그래왔습니까

목숨을 지나서도 타오르는

무슨 한 덩어리 불이 있겠습니까


너무 모욕을 받았는데

너무 큰 모욕이 지나갔는데

울지 않아도 되겠습니까


/ 김승희, '아네모네 꽃이 핀 날부터' 중


꽃이 피어나는 것도 사랑이 있어서일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서도 이 시는 되풀이해서 물음을 던진다. '죽도록 사랑하면'이라는 전제는 왜 한 번으로는 안 되는지? 그렇지 않고서는 꽃이 피어날 수 없는 것인지? 김승희가 보는 아네모네는 한 덩어리 불로 이글거리며 타오른다. 그리고 이번에는 모욕으로까지 이르러 살아있음의 고통을 꽃으로 하여금 짊어지게 한다. 엎드린 기도가 길다. / 이근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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