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상합니다

사랑받았던 기억을 이력으로 삼는 사람

by 신지후

내가 살아있을 이유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해왔습니다.
나를 지켜낼 삶의 안전장치가 내내 필요했지만,
이제는 굳이 뭐가 없어도 위태롭지 않은 사람이 되겠습니다.

사랑하길, 그리고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1

무용 시간, 왈츠 선율이 흐르고 선생님은 은호를 지목했다. 은호는 바닥을 한 번 내려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최은호, 네가 제일 친해지고 싶은 애한테 가봐.”

선생님의 짓궂은 농담에 은호는 망설임 없이 내게 다가와 손을 내밀었다. 아이들이 일제히 환호성을 내질렀다. 무용실을 가득 채운 웃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흩어졌다. 우리는 모두 똑같은 파란색 체육복을 입고 있었지만, 내 눈에는 그 푸른 바닷속에서 은호만이 유독 선명한 파랑으로 넘실거리는 것 같았다.

반 아이들 앞에서 우리는 왈츠를 췄다.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왁자지껄한 소음이 순식간에 아득한 먼 곳의 일처럼 멀어졌다. 키가 큰 은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발을 맞췄다. 서로의 발을 밟고 피하다 다시 손을 맞잡을 때면, 손바닥에 배어 나온 땀이 들킬까 봐 마음을 졸였다. 은호의 나직한 숨소리가 고요하게 귓가를 파고들었다.

“너는 눈이 참 예쁘다.”

그때 알았다. 이 아이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 내가 있었다는 것을.

1999년 열여덟의 봄, 나는 이 왈츠가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2

나에게는 사람을 음식에 비유해서 기억하는 버릇이 있다. 은호는 미소된장국 같은 사람이었다. 자극적이지 않으면서도 따뜻하고, 한 모금 들이키면 차가웠던 속이 이내 발그레하게 데워지는 그런 사람. 미소된장국을 먹을 때면 은호가 생각나서 남몰래 슬며시 미소지었다.

나는 은호의 갈색 단발머리를 오래도록 눈에 담았고, 하얀 얼굴 위로 놓인 까만 뿔테안경을 자주 복기했다. 은호는 내가 기꺼이 올려다볼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스스로를 하늘이라 칭하던 아이.

“나는 하늘이지.”

그 말을 들은 뒤부터 하늘을 올려다볼 때면 은호가 생각났다.

3

서른둘, 은호가 죽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봄꽃이 피어났다. 그해 봄날 나는 나무막대기 하나를 주워 시멘트 바닥을 후려치며 걸었다. 부고를 접한 새벽부터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정신을 차려보면 울고 있었다.

은호가 세상에서 사라진 뒤, 나는 지독한 허기에 시달렸다. 아니, 그것은 허기라기보다 은호를 내 몸속에 가두어두고 싶은 집착에 가까웠다. 나는 삼시 세 끼를 오로지 미소된장국 하나만 놓고 밥을 먹기 시작했다. 다른 반찬은 필요 없었다. 뜨거운 국물을 삼킬 때마다 은호의 나직한 목소리가 식도를 타고 내려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반년을 넘게 미소된장국만 먹었다. 은호가 내 안에서만큼은 죽지 않기를 바라면서.

4

동네 놀이터에서 그네를 탔다. 검은 옷을 입고, 깊은 새벽이나 아주 늦은 밤에만. 하늘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지칠 때까지 그네를 밀어 올리던 어느 날, 경비아저씨가 다가왔다.

“아가씨, 여기서 뭐 하는 거요? 주민 신고가 들어왔어요.”

밤마다 그네를 타는 미친 여자 때문에 무서워서 잠을 못 자겠다는 민원이었다. 그날 이후, 다시는 그네를 타지 않았다.

5

8월 16일, 그날은 은호의 생일이었다. 서울역 계단을 내려오다 두어 칸을 남겨두고 발을 헛디뎠다. 그대로 주저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은호는 잘 웃지 않는 사람이었고, 은호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기억 속에도 없는 은호의 환한 웃음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날이었다.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을 영영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6

꿈속에서 부고를 들을 때마다 정신을 잃었다. 시간을 가늠할 수 없는 혼돈 속에서, 은호의 부고를 들었던 새벽 5시 15분이면 어김없이 알람이 나를 깨웠다. 눈을 뜰 때마다 은호가 없다는 사실은 매번 처음처럼 생생한 통증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함께한 세월 동안, 혹은 함께할 수 없었던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을까. 친구였을까, 아니면 첫사랑이었을까.

7

1999년 9월 5일. 늦은 밤, 집 근처 놀이터 벤치에 앉아 은호의 고백을 들었다. 웅덩이에 고인 빗물 위로 가로등 불빛이 일렁였고, 은호의 작은 그림자와 떨리는 목소리가 공중에 흩어졌다. 비가 그친 뒤의 밤공기는 서늘했다. 심각한 분위기에 압도되어 가만히 있었다. 추우니까 그만 집으로 돌아가자는 말도 하지 못하고.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큰언니가 우리를 부르러 나오기 전까지, 우리는 지독한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어두운 데서 둘이 뭐 해? 빨리 들어와.”

언니의 목소리에 그제야 참았던 숨을 내뱉었다.

“계속 친하게 지내고 싶다는 말이지? 그런 뜻이지?”

내 물음에 은호는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이었다.

“여태 내 말을 뭐로 들은 거야. 이러다 너한테 키스하고 싶어지면 어떡해.”

뭐? 키스? 지금 나한테 키스라고 말한 거야? 절대로 들어서는 안 될 말이라도 들은 것처럼 두려워져 그 말을 뒤로하고 집까지 정신없이 뛰어왔다.

8

어쩌면 너보다 내가 먼저 너를 좋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내내 했다. 사랑을 우정이라는 이름으로 착각했을지도 모른다고. 스무 살이 되던 해, 더는 친구로 남을 수 없어 이번에는 내가 먼저 고백을 건넸다.

“말이 안 되는데 내 마음이 자꾸만 되니까, 너랑 결혼도 하고 싶어. 같이 살자, 은호야. 나랑 헤어지지 말자.”

은호는 ‘사모할 연(戀)’ 자를 붙여 나를 ‘연’이라 불렀다. 그 이름을 부르며 드물게 사랑한다는 말도 덧붙여주었다.

“연아, 나는 영원이라는 말을 믿지 않아. 하지만 너에게만큼은 믿어보고 싶어.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야.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라는 걸 알아줘. 그리고 고마워, 내 곁에 와줘서.”

9

부슬비가 내리는 초여름 밤이었다. 함께 우산을 쓰고 말없이 한강변을 걸었다. 묵묵히 우산을 받쳐 든 은호의 어깨 위로 빗방울이 굴러 떨어졌다. 그 좁고 아늑한 우산 속이 우리에게는 세계의 전부였다.

“은호야, 우리가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면 어쩌지?”

“사랑하면 누구나 이런 불안이 찾아오나 보다. 연아, 괜한 걱정으로 사랑만 해도 모자란 시간을 슬프게 낭비하지 말자.”

비가 그친 밤거리를 다시 걸었다. 비가 그쳤는데 우리의 우산을 향해서만 비가 계속 내렸다. 고요한 우리의 세계가 달빛 아래 너울거렸다.

10

은호는 꿈속에서도 자꾸만 죽었다. 어쩌다 은호가 죽지 않는 꿈을 꾸는 날이면, 우리는 대개 마주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연아, 여섯 살 때 사고 났을 때 많이 무서웠지?”

“아무도 기억나지 않았어. 내가 나를 기억하지 못하는 게 제일 무서웠어.”

“지금은 어때?”

“나이가 들수록 순해졌어. 이제는 그러려니 하게 돼.”

“그래. 나아지고 있으면 된 거야.”

“가끔 내가 나쁘고 한심한 사람 같아서 괴로워.”

“연아, 너는 이대로 충분히 예쁘고 좋은 사람이야.”

꿈속의 은호는 늘 나를 다독여주었다.

11

생애 최초의 기억은 뜨겁게 달아오른 아스팔트 위에 내가 울면서 널브러져 있던 장면이다. 나를 빙 에워싼 사람들의 비명과 고함, 그리고 달려오던 엄마의 울부짖음.

그때 나를 구경하던 수많은 눈동자들은 어린 나에게 공포였다. 사고의 통증보다 무서웠던 건 낯선 시선들의 무게였다. 악몽 속에서 구경꾼들은 쓰러져 있는 나를 둘러싸고 서서 손가락질을 하거나 비웃을 뿐이었다. 그런 꿈에 시달린 날은 종일 무력감에 시달려야 했다.

떨리는 손길로 나를 안아주던 엄마의 온기. 그러나 나는 그 품을 알아보지 못했다.

“내 딸, 많이 놀랐지? 괜찮아. 엄마랑 병원 가자.”

이 사람이 엄마인가 보다, 짐작할 뿐이었다. 기억을 아무리 헤집어도 남은 것이 없었다. 엄마를 알아보겠냐는 다그침에 겁이 나서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햇볕은 눈부셨고, 피로 물든 몸 위로 땀이 흘렀다. 그 순간, 나는 이것이 꿈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12

주어진 삶의 조건에 순응하지 못했다. 커서 남자 경찰이 되겠다며 태권도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 처음 한글을 배우고 가족들에게 세 줄짜리 유서를 썼다. 누가 볼까 봐 꼬깃꼬깃 접어 매일 아침 양말 속에 숨겼던 종이를 여덟 살 봄날, 다시 펼쳐보니 연필 자국이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이상하, 이상하라니. 내 이름을 알게 되었을 때, 그것이 낯설면서도 이상하게 나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라는 이유만으로 이해되는 순간들이 늘어날수록 세상은 조금씩 살만해졌다.

13

스물셋 여름, 바들바들 떨며 언니들에게 커밍아웃을 감행했다. 잠도 오지 않고 밥도 넘어가지 않아 며칠 만에 체중이 4kg이나 줄었다. 몸이 떨리고 눈동자가 커졌다. 거울 속의 내가 무서워 울다가 웃기를 반복했다.

“나 은호 사랑해. 우리 서로 사랑하고 있어. 그냥 은호랑 평생 같이 살게 해 줘.”

제발 이해해 달라는 간절한 부탁에 작은언니는 맑은 정신으로 정돈된 삶을 살라며 차갑게 돌아섰고, 큰언니는 나를 끌어안고 울었다. 다음 날, 학교 정문 앞에 서자 정신이 바스러지는 기분이 들었다. 비밀을 발설한 탓에 주위 사람들이 모두 죽었다는 망상에 빠졌다. 마요네즈를 못 먹는 내가 냉장고를 열어 마요네즈를 먹으며 음독자살하겠다고 소동을 피웠다. 난데없이 “내 생일은 6월 18일. 시팔! 시팔! 시팔이라고!” 악다구니를 쓰기도 했다. 천사 같던 엄마는 “악마 같은 계집애 때문에 내 딸이 병들었다”며 분노했다. 모든 말들이 외계에서 수신된 것처럼 아득하게만 들렸다.

14

스물넷 초봄, 우리는 끝내 이별했다. 헤어지자는 내 말에 은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대신 나를 데리고 근처 노래방으로 향했다. 어두컴컴한 방 안, 미러볼의 난잡한 불빛 아래서 은호는 빅마마의 ‘체념’을 불렀다.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이 노래 가사가 되어 은호의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그 노래가 내게 줄 수 있는 마지막 축복이자 절규임을 나는 알았다. 마이크를 잡은 은호는 울먹이고 있었지만 끝까지 노래를 멈추지 않았다.

15

아주 어릴 적부터 나 자신을 소년이라 여겼다. 나이가 들어서도 흰머리 소년이기를 원했다. 어른이 될 자신이 없어 ‘내가 태어난 날짜에 죽어야지’라는 다짐을 가슴에 품고 살았다. 가족들이 아파할 날이 일 년에 하루뿐이라면, 내가 사라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막상 생일이 오면 나를 축하해 주는 사람들의 진심이 기뻐서 차마 죽을 수가 없었다. 살고자 하는 의지가 바닥난 날마다 태어난 보람을 느끼는 아이러니. 생일이 지나면 안도하는 내가 있었다.

‘이대로 어른 여자가 되면 어떻게 살지?’ 열한 살, 봉긋하게 솟아오른 가슴을 보며 느꼈던 절망은 잊지 못할 것이다. 여성이 된 것이 천형처럼 느껴졌으나, 어느덧 어른 여자로 살아온 지 23년. 이만큼 살아왔으니 이제는 괜찮다.

일곱 살 때 처음 알았던 인상적인 단어는 ‘감질나다’였고 왠지 사는 게 감질나서 힘든 나날을 보냈다. 사랑을 받아도 만족스럽지 못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잘 모르겠는데 나 자신이 아까워서 살아남았다. 추하게 버리기에는 아까워서. 단 한 번도 나를 찌르지 않고 살아남았다고 하지만 마음 위로 자해의 칼날을 그어대며 살아온 숱한 날들이 있었다.

16

서른, 초록이 짙어지는 6월에 동갑내기 ‘준’을 만났다. 서른의 남자가 아이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다는 걸 준을 통해 처음 알았다. 행복한 순간들을 의식적으로 붙잡으려 애썼다. 그와 함께라면 고단한 노력조차 즐거울 것 같았다.

“나처럼 제멋대로인 사람을 너는 왜 좋아해? 감당이 돼?”

“너는 착한 사람이야. 착한 사람이니까 다 이해할 수 있어. 네 행동에는 다 그럴 만한 이유와 명분이 있다고 믿어.”

일 년 뒤 같은 질문을 던졌을 때, 그는 “그러게, 나 진짜 대단하다!” 하며 웃었다. 준은 넉넉하고 온화한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가장 큰 자신감이 바로 나라고 말해주었다. 심하게 다툰 날에도 그는 이런 메시지를 보내왔다.

[우리 사이가 어떻든 네 생활에는 지장이 없었으면 좋겠다. 나보다 네 삶과 네 자신을 먼저 돌봐. 순간에 함몰되지 말고 미래를 생각해. 내일은 새 하루를 시작하길. 좋은 날 보내.]

17

은호가 죽은 뒤 잡지사 기자 일을 그만두고 매일 울기만 했다. 준은 내게 자신의 카드를 내주며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쉬라고 했다. 무언가를 배워도 좋고, 근교의 유원지로 훌쩍 떠나도 좋다고. 하지만 나는 그 카드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술값을 냈다. 술은 입에도 대지 않으면서 모든 비용을 결제했다. 지직 영수증 뱉어지는 소리가 나를 비난하는 준의 한숨처럼 들렸다.

나는 준이 속상해하길 바랐다. 그의 무결한 사랑 앞에 초라해지는 나를 견디는 대신, 그가 품은 희망을 내 손으로 꺾어버리려 했다.

작은언니가 결혼하던 날, 준이 결혼식 사회를 봤다. 자신을 소개하며 “예비 셋째 사위 서준입니다.”라고 씩씩하게 말하던 그의 모습이 가끔 떠올라 현기증이 났다. 막연히 준과의 결혼을 꿈꾸기도 했지만 준과 결혼해서 좋을 사람은 나뿐이었고, 이를 알면서도 결혼할 만큼 뻔뻔해질 수는 없었다. 나는 파산 면책 신청하듯 이별을 고했다. 한꺼번에 많은 것을 잃었지만 떠안고 있던 빚을 청산한 것 같아 홀가분함이 더 컸다.

18

5년이라는 결코 짧지 않은 시간을 만나왔던 준과 이별 후 5년이 지나서야 준이 꿈에 나왔다. 꿈속에서 우리는 서른 번째 결혼기념일을 맞이하고 있었다.

“부부로 서른 해를 살다 보면 서로에게 오래된 가구 같아져. 꼭 마음에 차지 않아도 익숙해서 편안한 그런 거.”

“하하. 나는 가구 중에 뭐 같은데?”

“당신은 낡은 장식장 같아. 키가 크고 어깨가 넓어서, 내가 숨고 싶을 때마다 그림자를 만들어주잖아.”

“그럼 당신은 밤마다 몰래 열어보는 냉장고네.”

“치, 먹을 거나 주는 사람이라는 거야?”

“아니. 어두운 거실에서 유일하게 환한 빛을 내뿜는 곳이잖아. 차가운 세상 속에서도 우리 마음을 상하지 않게 지켜주는 곳. 당신은 나한테 그런 존재였어.”

꿈에서 깨어나자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냉장고 문을 열 때의 서늘하고도 환한 빛이 바로 준이 내게 주었던 사랑의 온도였음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19

지나쳐온 기억 속에서 나는 언제나 스스로에게 지나친 사람이었다. 남에게 비난받기 전에 먼저 나를 벌하고 짓밟았다. 그렇게라도 해서 필사적으로 나를 보호해왔다.

이제는 마음이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내가 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응원해 주었으면. 여전히 세상에 적응하지 못해 모든 게 낯설지만 이렇게 살아 있으니 그것으로 됐다. 나는 변함없이 이상하겠지만, 일생을 그저 나로 살아가고 싶다.

20

나 이상해졌어. 요즘 매일 울어. 사람들과 어울려 웃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나. 불꽃놀이를 구경하다가 터지는 불꽃 때문에 하늘이 아플까 봐 울었다는 다섯 살 아이의 에피소드를 보고 한 시간이나 울었어.

교실 창가에서 네 머릿결이 바람에 날리는 걸 보며 졸았을 때 네가 커튼을 닫아주던 그 순간의 설렘을 기억해. 비에 젖은 나를 닦아주던 커다란 타월, 취한 나를 업어주던 너의 따뜻한 등. 하굣길에 나를 바래다준 너의 뒷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던 아파트 현관에서의 시간들. 나만 아는 너의 모습들. 은호야, 제발 사라지지 말아라. 가지 말아라.

21

어느 늦은 밤, 놀이터 벤치에 앉아 너의 이야기를 듣던 그때의 우리를 돌아본다. 고개가 아플 때까지 그때의 우리를 돌아봤다. 그때 네 손을 잡아주었더라면, 그거면 충분했을 텐데. 내가 나를 위로하고 싶을 때면 김동률의 ‘Replay’를 부른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이 노래가 너를 향한 추모곡이 아니라 단지 내가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노래가 될 수 있을까.

내 곁에 있는 미야의 예쁜 단발을 보며 은호가 떠올랐다. 두 사람은 전혀 닮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러지.

22

“나를 미야라고 불러줘요.”
스스로 지은 애칭만큼이나 사랑스러운 사람을 만났다. 서로의 아내가 되어준 우리. 나에게 특이가 아닌 특별함으로 다가온 미야는 내 삶의 구구절절한 얼룩들을 아름다운 무늬로 바꾸어주었다.

2025년 9월 5일, 결혼 1주년 기념일. 금요일 퇴근길 정체로 30분이나 늦어버렸다. 오후 5시 55분. 시계의 연속된 숫자에 눈길이 머문 순간, 아내 미야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아,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보고 싶어 한다는 믿음 덕분에 나는 잘 살아왔다는 안도감을 느꼈다.

약속 장소 모퉁이를 돌자 오렌지와 장미 향이 섞인 미야의 향기가 품 안으로 뛰어들었다. 미야가 나를 향해 환히 웃었다. 그 웃음은 더 이상 나를 옥죄는 타인의 시선이 아니라 내가 안식할 수 있는 유일한 풍경이다.

“나 여보 엄청 사랑해요. 함께여서 고마워요.”
미야의 벅찬 고백에 눈물이 났다. 과거를 곱씹느라 아무것도 이룬 게 없는 줄 알았는데, 내 눈앞의 사람은 내가 공들여 이뤄낸 꿈이었다.

23

어떤 사랑은 살아가는 것으로 증명된다. 오래전 아스팔트 위에서 길을 잃었던 아이는 이제 누군가의 손을 잡고 다정한 저녁을 향해 걷는다.

은호가 남긴 ‘연’이라는 이름과 미야가 불러주는 ‘여보’라는 다정함 사이에서, 나는 가장 나다운 빛으로 반짝인다. 비로소 나는, 내가 나인 것이 좋다. 그래도 가끔 울지만.

24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다.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다.
사라지는 마음이 아니다.

나는 미래에서 다시 살고 싶었던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온 사람. 문득 눈앞의 풍경들에 시선이 머물면 오래전 한 번쯤 살아본 순간들 같아서 눈물이 고일 때도 있다.

너의 꿈을 꾸고 난 아침마다 평생 마음이 아플지도 모르지만, 그 아픔조차 꿈으로 이어지기를. 어떤 형태로든 사랑은 돌아온다고 믿으며 사랑이 계속됐으면 좋겠어, 은호야. 너에게 고마워. 우리의 처음부터 나는 네가 고마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