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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미인박명

by 김지민

2024년 5월 28일 >>>


내가 별명으로 온라인에서 “C1”이라 불렀던 교인이 있다. 영어 알파벳 C, 아라비아 숫자 1이다. 지금은 이사를 갔지만, 아무튼 이 집은 부부가 공히 박사요, 딸은 수재(秀才)를 넘어 신동(神童)이다. 영어로 한국말로 성경도 척척 암송하고, 노래와 율동도 잘 하고, 물론 학교 공부도 일등이다. 게다가 그 어린 아이가 어찌 그리 겸손하고 예의가 바른지 나는 볼 때마다 늘 신기하고 대견했다. 필시 크게 될 인물이라며, 우리 둘이 악수하는 사진도 일부러 한 장 청해서 찍었다. 부전여전이라고, 그 아빠 C1을 보면 그런 딸이 이해된다. C1은 침착하고, 사려 깊고, 겸허하고, 희생적이며, 또 뛰어난 유머센스에 신앙심도 남달리 돈독한, 어디 하나 뺄 데 없는 젊은이다. 나보다 20년 아래지만, 그래서 나는 그를 존경한다.


그처럼 모든 면에서 나와는 전혀 딴판이고 내게 무언의 본이 되었던 C1은 족구 실력 또한 월등했다. 내가 발 재주가 딸려 뒤에서 수비만 보는 데 비해, 그는 부동의 득점왕답게 늘 네트 앞에서 통쾌한 킥으로 많은 점수를 올렸다. 그날도 제비뽑기로 네 명씩 편을 갈랐는데, 나는 C1과 한 팀이 됐고 그간의 통계상 7~80% 승리를 확신했다. 한 가지 변수는, 평소와는 달리 각 팀에 곧 졸업을 앞둔 고3 한 명씩이 포함돼 있다는 점이었다. 한때 프로야구 선수를 꿈꾸었던 다부진 체격의 상대 팀 학생은 네트를 사이에 두고 C1과 마주보는 공격수 자리, 우리 팀의 신장 190cm 꺽다리 의대지망생은 C1 저 우편의 우익공격수 자리에 섰다. 그의 뒤에 내가 수비수로 서 있었다.


경기가 시작됐고, 승부는 일찌감치 눈에 보였다. 저 편 학생은 그냥 잘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우리 네 명을 가지고 놀았다. 어떤 땐 세게, 어떤 땐 약하게, 한 번은 길게, 또 한 번은 짧게, 전혀 예측불가한 신출귀몰의 발재간 앞에 우리는 그냥 허수아비였다. 신성한 운동경기에서 상대가 잘 하는 걸 어찌 불평하랴? 기울어지는 스코어를 쓰리지만 그렇게 삭이고 있는데, 정녕 내 인내심을 테스트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닌 “바로 C1 그 사람”. 그 학생의 묘기가 터질 때마다 “나이스!(Nice!)” 하며 환호하고, 짝 소리 나게 네트 너머로 둘이 하이파이브(high-five)도 하고, 특유의 유머로 온갖 칭찬을 다 하고...... 나는 속으로 “아니, 저 자(者)는 도대체 우리 편이야, 저 쪽 편이야?” 하며 한없이 못마땅해했다.


그런 내 불만 속에 두번째 게임이 이어졌다. 겨우겨우 그 학생의 공격에 좀 익숙해지고 있는데, 이번엔 우리 학생이 죽을 쑤었다. 갈대처럼 하늘하늘 연속 헛발질만 하는가 싶더니, 급기야는 차라리 없는 편이 더 나을 정도로 어이없는 실점들을 계속했다. 거기에 대 놓고도 C1은 “괜찮아, 잘 하고 있어!” 하며 손뼉을 치고 좋아했고, 나는 마침내 뚜껑이 열렸다. 족구에서 발끝이나 머리가 네트를 살짝 넘는 건 다반사고 또 그런 건 서로 애교로 봐 주지만, 결코 몸 전체가 넘어가는 일은 없다. 그런데 내가 전대미문의 기록을 세웠다. 우리 학생이 또 실수할 것을 확신, 그의 앞으로 오는 공을 가로채려 내 몸이 하늘 높이 공중부양...... 공도 놓치고 몸의 밸런스도 놓치며 쿵, 적군 콘크리트 바닥에 내리꽂혔다.


머리부터 안 떨어진 것은 필경 하늘이 도우셨음이리라. 공중 1회전을 채 못다한 나는 뒷목과 어깨로 둔탁한 착지를 한 뒤 그대로 길게 뻗었다. 큰 사고를 당하면 필름이 끊긴다더니 정말 그랬다. 언제 나를 들어 옮겼는지 어느새 나는 코트 밖 철망에 기대어 있었다. 분명 족구를 하고 있었는데...... 뭐가 잘못 됐는지, 내가 왜 이러고 있는지, 정신이 계속 오락가락했다. 그리곤 오랜 시간이 지나고 긴 세월이 흘러 다가온 깨달음.

“C1은 나보다 훌륭한 사람 이전에, 나랑은 다른 세계의 사람”

인 것이었다. 내 자잘한 승부욕에 극명히 대비되는 그 푸근한 “여유”. 그것은 믿음이 있고 소망이 저 먼 곳에 있으매 늘 사랑이 넘치는, 그런 “선택된 자”만이 누리는 귀한 선물이었던 것이다.


도(道)가 높으신 분들은 한결같이 그런 “여유”가 몸에 배는가? 어느 기자의 질문에 대한 고(故) 김수환 추기경님의 멋진 대답은 두고두고 잊을 수 없다.

“추기경님, 외국어를 7, 8개나 능통하게 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 중에서도 어느 말을 가장 잘 하십니까?”

“네, 뭐니뭐니해도 거짓말을 제일 잘 하죠.”

나의 짓궂은 질문에 대한 뉴저지 어느 한인교회 목사님의 답변도 너무 재밌다.

“목사님, 조강지처 버리고 잘 되는 케이스 혹시 없습니까?”

“허허, 그런 거 있었으면 제가 제일 먼저 했지요.”

그 목사님은 현재 결혼 50년차, 여태 사모님한테 목소리 한 번 안 높이고 늘 섬기며 순종하며 사신다.


한번은 TV 채널을 이리저리 돌리다가 기독교 방송 어느 원로 목사님의 간증에서 멈췄다. 앞뒤 문맥으로 보아 그 목사님 60대 중반의 일화인 듯했다. 사연인즉슨 이랬다. 목사님 또래 여자 권사님 한 분의 임종이 임박해 몇몇 교인들과 병상을 방문, 고별예배를 드렸다. 예배 후, 그 권사님이 힘든 호흡을 가누며 뭐라 말씀을 하시는데 소리가 너무 작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목사님이 바짝 몸을 구부려 그녀의 입술에 귀를 갖다 댔다. 순간, 모기 소리처럼 가녀린 그녀의 마지막 한 마디,

“목사님, 미인박명이잖아.”

하하, 나도 나중에 이처럼 여유롭게 떠날 수 있을까? 시시한 눈물 대신 C1한 웃음을 모두에게 선사하며.


PS) 별명 “C1”은 최시원 씨의 이름 “시원”에서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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