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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가장 듣고 싶은 말

by 김지민

2024년 6월 3일 >>>


성경책의 앞 표지 안쪽에는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이 주로 적혀 있다. 전자는 “기도는 이렇게 하라”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 후자는 “우리는 이런 것을 믿습니다” 하는 기독교인들의 신앙고백이다. 우리 교회는 이 사도신경을 예배 초입에 함께 읊는데, 그 암송의 맨 끝 부분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에 오면 나는 어김없이 목소리가 쑥 기어들어 간다. 사람이 특별히 잘나지는 못해도 최소한 언행은 일치해야 하는 법. 그런데 부활과 영생을 믿는다 고백하기엔 내 실제 삶이 너무 안 받쳐 주기 때문이다. 삶은 고사하고, 얼굴 표정에서부터 그런 기쁨이나 평안, 여유 같은 것이 나는 없다. 다른 교인들은 다 괜찮으신지 그 끝 부분에서 암송 소리가 전체적으로 쑥 죽는 일은 지난 10년간 단 한 번도 없었다.


약 20년 전 기러기 아빠 시절, 뉴저지에 아내와 아들딸을 보러 갔다가 일요일이 되어 교회를 갔다. 가끔씩 방문하지만 그래도 다 안면은 있어 인사들을 나누던 중, 특별히 한 부부가 눈에 띄었다. 늘 뭔가 초조하고 위축돼 보였던 분들이 몇 달 새 얼굴에서 광채가 난다 싶을 정도로 확 달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일견 약간 도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너무 궁금해서 내가 살짝 여쭤봤다. “목사님, 저 분들이 완전히 딴 사람이 됐는데요, 무슨 좋은 일이 있습니까?” 목사님 왈, “예, 부모님 유산을 많이 물려받고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것 같습니다.” 물론 좋은 일이고 축하할 일이었지만, 그들의 높은 직분을 생각하면 씁쓸했다. 지금 돌이켜보면, “구두”로 약속 받은 부활과 영생으로는 도저히 안 펴졌던 그 분들 얼굴이, “현찰” 몇 십 또는 몇 백만 불 앞에서 순식간에 확 아름답게 펴진 것이었다.


그 몇 년 후, 사업에 실패하고 시카고에 가 있었던 나는 2010년 초에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1회 타이핑했다. 다니던 교회의 “성경필사” 대회에서 경쟁이 붙는 바람에, 체중이 5kg이나 빠지는 분투 끝에 총 66일 최단기간 필사로 그 교회 명예의 전당에 올랐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의 시작과 끝이 내가 막연히 알던 세상과 너무 상이함에 우선 놀랐다. 놀라운 구원의 약속이 있음에도 대부분 기독교인의 삶이 크게 남다르지 않음에는 더욱 놀랐다. 그래서 부지런하고 잘나가는 생물학박사 우리 순장을 넌지시 떠봤다. “많은 것을 이루셨고 또 죽어도 천국 가시는데, 왜 이처럼 아등바등 사십니까?” 그가 대답했다. “천국은 따 놓은 당상이고, 이왕이면 이 땅에서도 잘 살면 좋지 않습니까?” 맞다, 받은 은혜를 생각하면 실로 부끄러운 일이다, 뭐 이런 대답이 아니어서 너무 의외였다.


얼마 후, 이번엔 경영학박사 어느 독실한 신자에게 같은 질문을 하게 됐고, 그의 답변에 나는 입이 딱 벌어졌다. “천국은 따 놓은......” 운운하는 것이 전에 들었던 것과 거의 토씨 하나 안 틀렸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참 뒤, 나는 위의 모든 것을 다 합한 것보다 더 큰 충격을 또 한 번 받았다. “가령 타이타닉호 같은 재난에 어떤 어린이가 구명조끼도 없이 바둥거린다면, 특히 저희처럼 나이 든 크리스쳔은 흔쾌히 내 것을 벗어 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종의 “원론 확인차” 한 질문이었는데, 어떤 연세 높으신 분의 즉답은 참으로 놀라웠다. “난 못 줍니다! 한 30년 더 살아야 될 이유가 있으니까.” 그리고 나중에야 알게 됐지만 그 이유인즉슨, 말세의 징조가 짙고 예수의 재림이 임박해 보이는 바, 자신은 그 재림 때에 산 채로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야 하므로 꼭 오래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부활과 영생은 이미 “확보”됐다고 자만하며, 거기에 덤으로 돈, 출세, 심지어 “불사(不死)”까지 탐내는, 이런 “욕심충만”한 인물들이 어떻게 안수집사며 장로일까? 유별난 우리 한국 교인들만 혹시 이런 건 아닐까? 내가 훗날 시카고에서 운전 중에 들었던 무디(Moody) 방송의 한 예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준다. 성도가 세상을 떠났을 때, 미국 교회에서는 대개 강대상 아래 긴 테이블 위에 놓인 “뚜껑 열린 관” 앞에서 교인들이 한 명 한 명 고인의 얼굴을 보며 마지막 작별을 고한다. 그리고 장례예배 순서의 하나로, 두세 교인이 차례로 강대상에 올라가 고인을 내려다보며 덕담을 하거나, 좋은 추억을 말하거나, 추모사를 낭독한다. 어느 교회 목사님이 최근에 치러진 한 장례식을 상기시키면서, “저도 여러분도 언젠가는 다 저 밑에 누워서 사랑하는 교우들의 고별사를 듣게 됩니다. 그때 사람들이 여러분에게 어떤 말을 해 주기를 가장 원하는지 한 분씩 나와서 얘기 좀 해 보시죠.” 하고 제의했다.


평생을 교육에 몸바친 어느 초등학교 교사는, 지성보다 인성을 더 중시하며 오랜 세월 많은 인재를 길러 낸 그 지역 최고의 선생님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유명한 변호사 한 사람은 나와서 말하기를, 오직 정의를 위해 싸웠으며 불쌍한 사람들에겐 서슴없이 무료변호를 제공한 강직하면서도 따뜻한 법조인이었다는 평을 듣고 싶다고 했다. 또 어떤 나이든 의사는, 하루 24시간, 일주일에 7일, 어느 날 어느 때고 아무 소리 없이 환자들을 받아 마치 자기 가족처럼 돌봐 준, 천사와 같은 분이었다는 말을 들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끝으로, 크게 성공한 사업가로서 지역사회에 많은 물질적 기여를 한 그 교회 수석장로의 차례가 됐다. 저 밑에 누우시는 날 어떤 말을 가장 듣고 싶으시냐는 목사님의 질문에 잠시 멈칫거리던 그는, 그 어떤 찬사보다 다음과 같은 비명을 듣고 싶다며 소리쳤다


“으악, 저것 봐라!! 저기 저 누워 있는 사람이 움직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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