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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

by 김지민

2024년 7월 19일 >>>


피어스 브로스넌/르네이 루소 주연의 “The Thomas Crown Affair (1999)”는 스티브 맥퀸/훼이 다나웨이 주연의 1968년 원작(原作)을 리메이크한 영화다. 꼭 추천하고 싶은, 아주 기발하고 흥미진진한 영화다. 우리 회사 “브릴리언트(brilliant.org)”의 탄생도 이 영화의 영향을 틀림없이 어느 정도 받았을 텐데, 그것이 미미했는지 꽤 컸는지는 하늘만이 아실 일이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만일 “브릴리언트(brilliant.org)”가 걸어온 길을 영화로 만든다면, 두 영화에 서로 비슷한 장면이 2~3분 가량 꼭 나오리라는 것이다. 과연 어떤 장면일까?


내가 투자일임사를 3년 만에 접은 것이 2005년, 완전히 미련을 버린 것은 2008년이었다. 집안을 살리려면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겠다고 판단, 우리 딸이 벤쳐(venture) 세계를 넘보기 시작한 것은 그 이듬해. 나는 자식들과 대화가 없으니 상당 부분 아내한테 들은 얘기다. 아무튼 수연이는 --- 미국 이름 Sue Khim (수 킴) --- 1등 상금 2만불에 매료되어 2009년 어느 “벤쳐 대회”에 처음 출전했다. 어떤 아이디어로, 어떤 준비를 해서 나갔는지는 모른다. 푼돈 말고 "큰돈"을 엄마한테 갖다 주고 싶은 효심 하나로 도전했는데, 일단 실패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밥(Bob)이라는 시카고대(大) 비즈니스 스쿨 교수와 친하게 된 것이 진짜 큰 복(福)이었다. 수연이더러 자기를 “교수”라 부르지 말고 예비 사업가답게 그냥 “밥(Bob)”, 자기 퍼스트네임(first name)을 불러라 할 정도로 서로 절친했다. 소소한 상금에서 눈을 돌려 “벤쳐 사업 그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된 것은 전부 그의 덕이었다. 되돌아보면, 똑똑똑, 수연이가 Bob 교수의 방을 처음 노크했을 때, 꿈 같은 미지의 신세계가 “Welcome, Sue!” 하며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와튼(UPenn Wharton) 등 미국 “명문” 비즈니스 스쿨 중에서도 --- 기준에 따라 약간씩 차이는 있겠지만 --- 최고로 쳐주는 학교가 시카고대 비즈니스 스쿨(The University of Chicago Booth School of Business)이다. 보통 “시카고 부쓰(Chicago Booth)”라 부르는데, 학교 설립에 기록적인 금액 3억불을 기부한 David G. Booth의 성(姓)을 딴 약칭이다. 10명의 노벨상 수상 교수를 둔 이 자존심 있는 대학원 --- MBA와 Ph.D. --- 과정은 입학도 졸업도 매우 힘들다. 실제로 직장이 있으면서 야간에만 수업을 듣는 학생의 경우는, 몇 년을 공부하고도 결국 석사학위, 즉 MBA를 못 받을 수도 있다. 밥(Bob) 교수는 이 시카고 Booth의 교수로 있으면서 딱 두 명의 학생에게 투자했는데, Sue에게 벤쳐 초기자금 5천 불을 대준 것이 그 중 두 번째였다. 그 소액의 투자가 불과 몇 년 뒤 상상초월의 배수로 불어난 덕에, 그는 바라던 조기(早期) 은퇴를 하고 유럽에 근사한 집을 사서 지금 유유자적 노후를 즐기고 있다. 이런 혜안이 있었으니 애초 그 명문 학교의 교수가 됐으리라.


바로 이 시카고 Booth의 많은 수업들 중에 Sue의 관심을 끄는 것이 하나 있었다. 수강생 전원이 2인1조로 팀을 짜서 각기 유망한 벤쳐 사업 아이디어를 내고, 그것을 학기 내내 발전시키고, 학기말 “벤쳐 대회”에서 구체적인 사업안(案) 및 향후 전망을 최종 발표하는 수업이었다. 소정의 과목들을 다 이수하여 곧 MBA 졸업이 임박한 학생들만 들을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Sue는 Booth의 학생도 아니지, 졸업은커녕 수업 하나 들은 게 없지, 게다가 대학원생이 아닌 학부생이지, 또 경영/비즈니스와 아무 상관없는 수학과 학생이지...... 너무 당연히 자격미달이었다. 훗날 Sue가 Booth의 초청강연에서 회고했듯이, “이 수업에 들어가는 것”이 그녀에게는 진정 “벤쳐의 시작”이었다. 처음에 그 과목 담당교수를 만났을 때 Sue는 예상대로 “안 된다”는 답을 받았다. 그러나 끈질기게 찾아가자 교수는 “너랑 팀을 이룰 파트너 한 명을 구해 오면 수업을 듣게 해 주겠다”고 했다. 마침내 Sue는 수강 학생들의 전화번호를 그 교수에게서 얻어 한 명 한 명 전화를 돌리기 시작했다.


불가능을 모르는 한국 소녀 Sue, 수십 통의 전화 끝에 결국 한 사람을 찾아냈다. 숙제도 리포트도 다 내가 할 테니 “이름만 좀 빌려 달라"는 조건에 응한 Booth 학생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그 수업을 듣게 된 Sue는 학기말 “벤쳐 대회”에서 입상, 그 삼빡한 신축 Booth 건물 한 켠에 책상도 얻고 복사기/팩스 무료이용 패스(pass)도 얻었다. 벤쳐에 입문하여 드디어 오피스 비슷한 것이 하나 생긴 이 때가 2010년 초. 사업 구상에 골몰해 월셋방에 가는 시간도 아까울 때는 책상 아래 슬리핑 백에서도 잠을 잤다. Sue는 곧 엄마의 반대를 뿌리치고 “학업중단, 벤쳐진출”을 공식 선언했고, 300개의 벤쳐 회사가 경합하는 “미국 중서부 벤쳐 예선대회” 출전 준비를 시작했다. 지금까지가 소위 “연습 게임”이었다면, 이제 막 “본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부부는 날만 새면 차를 몰아 Sue가 원하는 곳에 데려다줬고, 두세 달 뒤 어느 날 Sue는 자기 팀이 예선 통과 10개 팀에 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그 대회를 어느 날 어디서 했는지도 몰랐다.


30대1의 경쟁을 뚫고 미국 중서부 벤쳐 업계에 당당히 명함을 내민 Sue의 “드림 팀(dream team)”. 그러나 말이 팀이지 사실 팀원은 Sue 외에 한 명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 직원의 스카우트가 또 화젯거리였다. 컴퓨터/인터넷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IT (Information Technology) 시대. 어떤 회사를 세워 무슨 일을 하든 프로그래머는 꼭 필요했다. 그러나 고비용의 구인(求人) 사이트 가입, 고가의 헤드헌터(head hunter) 고용 등은 꿈도 꿀 수 없었던 무일푼의 상황.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무료 데이팅(dating) 사이트”였다. Sue는 거기에 가입, 수많은 남자들 중 컴퓨터 프로그래밍 전공자들을 골라 연락을 취했다. 그리고는 최종 한 인물을 선택, “곧 중서부 벤쳐 대회가 열린다. 대회 때 모든 말은 내가 다 할 테니, 당신은 내 옆에 앉아만 있어 달라. 그리고 유망한 사업이니 꼭 한번 같이 해 보자.” 하고 설득, 그 대회에 함께 출전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래머는 그 통화 이후 지금까지 줄곧 Sue랑 같이 일하고 있다. 데이팅 대신 프로그래밍 업무를 15년째 하고 있다.


이 예선 승자 10개 팀은 시카고 도심 어느 건물 한 층을 칸막이로 나눠 쓰면서, 이듬해 2011년에 있을 “본선” 대회를 각기 준비했다. 사무실 및 전기/전자기기 사용을 포함한 향후 몇 개월 지원금이 한 팀당 2~3만 불이라면, 추후 본선 입상으로 받게 될 궁극적인 투자금은 수 십만 불 단위였다. 거액의 벤쳐 투자자금을 놓고 매일매일 서로가 서로를 쳐다보며 선의의 경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Sue의 회사 “에듀렌더(Edulender)”는, 학창시절 멋 모르고 사인(sign)했다가 평생 학자금 상환의 노예가 되는 우매한 학생들을 위해, 개별 사정에 꼭 맞는 “최적의 융자”를 받게끔 도와주는 소프트웨어를 개발 중에 있었다. 훗날 Sue와 결혼하여 우리 사위가 된 사일러스(Silas)가 여름방학에 합류, “에듀렌더”는 --- 나중에 “올튜이션(Alltuition)”으로 이름이 바뀌지만 --- 유능한 프로그래머가 이제 두 명으로 늘어난 상태였다. 그렇게 한 달, 또 한 달이 흘러 드디어 2011년 초, 대망의 그 “본선”이 하루 뒤로 다가왔다. 아내는 일이 있어 한국에 잠시 가 있었던 때였다.


아침 일찍 수연이와 지 동생 도근이를 어디 데려다 주는 차 안에서, 나는 그 본선이 열리는 장소가 시카고 시내의 한 “소극장”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 순간, 번개처럼 뇌리를 스치는 장면이 있었으니 바로 영화 “The Thomas Crown Affair”의 유명한 씬(scene). 억만장자인 동시에 고가(高價) 미술품 도난 그 자체의 쓰릴(thrill)을 즐기는 주인공 토마스 크라운이, 형사들을 따돌리려고 똑같은 양복, 똑같은 넥타이, 똑같은 모자에, 똑같은 가방을 든 수십 명의 유인(誘引)용 디코이(decoy)들을 일시에 박물관 곳곳에 쫙 풀어 놓는 장면. 어느 쪽을 쳐다봐도, 어느 코너를 돌아도, 누구를 붙잡아 돌려세워도 다 비슷비슷한 사람들. 내가 말했다. “수연아, 아빠가 좋은 생각이 하나 있는데...... 내일 대회 시작 전에 에듀렌더 로고(logo)가 박힌 티셔츠를 대회 진행자들, 그 보조인력, 기타 관람객들한테 쭉 나눠 주면 어떨까? 거저 준다 하면 다 좋아서 받아 입을 거고, 그렇게 해서 온 극장이 에듀렌더 일색이 된다면 홍보효과가 엄청나지 않을까?” 수연이는 가타부타 별 반응이 없었고, 나도 그냥 그런가 하며 아이들을 목적지에 내려 주고 집으로 돌아갔다.


다음 날 아침 극장에 도착, 지하주차장으로 슬슬 차를 넣던 나는 깜짝 놀랐다. 디자인은 누가 했으며 제작은 그새 어떻게 했는지, 또 일일이 나눠 주기는 누가 언제 했는지, 주차요원들이 전부 하얀 “에듀렌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앞면은 언젠가 우리 가족이 머리를 맞대 만들었던 “에듀렌더” 로고. 뒷면은 IT 냄새 물씬 풍기는 재치 있고 참신한 디자인. 누구라도 탐을 냄직한 너무도 그 행사에 걸맞은 티셔츠였다. 올라가 보니 1층도 마찬가지였다. 극장 입구의 안내요원들, 무료 음료/칵테일/스낵을 만들어 주는 바텐더들, 객석을 돌아다니며 주문을 받고 나르는 웨이터들, 무대 위에서 마이크로 방송을 하는 진행요원들, 얼씨구나 하고 하나씩 얻어 입은 듯한 관람객들...... 수많은 사람들이 “Edu-Lender” 글자를 가슴에 단 채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바로 내가 상상하던 딱 그 장면이었다. 2층으로 올라가 아이들을 만나 본즉슨, 그 전날 도근이가 급히 디자인하고 수연이가 익스프레스(express)로 프린트를 맡겨 단숨에 배달 받은 것이라 했다. 아빠, 아들, 딸의 완벽한 팀플레이였다.


벤쳐에 성공하여 억만장자(billionaire)가 된, 시카고 벤쳐 업계의 전설이자 이 대회의 주관자인 샘(Sam)은, 평소 “벤쳐 성공(成功) 3계명”을 역설해 왔었다. 그러나 이 벤쳐 대회 후, “벤쳐를 하려면 Sue 같이 하라”는 제4계명을 추가했다는 내용의 글을 신문에 기고했다. 10개 회사가 칸막이를 치고 일했던 바로 그 건물에 자기 사무실이 있었던 Sam은, “아침에 출근할 때도 늘 Sue는 거기 있었고, 또 밤 늦게 퇴근할 때 봐도 Sue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고 했다. 그런 성실성에다 이번 대회에서 보여 준 독창성 내지 창의성은 벤쳐를 꿈꾸는 모든 사람의 귀감이 된다고 했다.


Sue는 이 대회 1등의 여세를 몰아 이듬해 2012년 초의 샌프란시스코 --- 지역 대회가 아닌 “전국” 대회라 할 수 있는 --- 대회에서 또 200팀 중 1등을 했다. 올림픽 승자들처럼 무대 위에서 사일러스(Silas)와 함께 금메달도 목에 걸었고, 상금 20만 불도 받았다. 그 기사가 이튿날 월스트릿저널(The Wall Street Journal)에 실렸는데, 사일러스(Silas)의 부친은 아침에 우연히 그 신문을 보고 위스칸슨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축하 전화를 해 주었다고 한다. 이 대회에서는 공짜 티셔츠도 없었다. 회사명만 바뀌어 올튜이션(Alltuition), 총 6명의 직원이 소프트웨어 개발을 거의 완성단계에 올려 놓은 상태였다.


이 샌프란시스코 대회 심사위원 중 한 명이 시상식 후에 Sue를 좀 보자고 했다. 시카고의 Sam보다 훨씬 더 크고 이름난 벤쳐 투자가인데, “올튜이션 사업은 미국 안에서만 유효한 로컬(local)한 것이니 그만 접고, 글로벌(global)한 것으로 아이템을 바꿔서 같이 한번 일을 해 보자”고 제의했다. 그리고는 컴퓨터, 사무실, 필요한 자금 등 모든 것을 다 대 줄 테니 전직원이 당장 실리콘밸리로 이사오라고 했다. 그리하여 탄생한 것이 지금의 “브릴리언트(brilliant.org)”다. 이 거물급 투자가는 “교육”이라는 큰 테두리만 제시, 어린 여학생 Sue에게 일체의 디테일을 다 맡겼다. 그리고 Sue는 그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미국 최고의 인재들을 모아 최상의 능력과 기지를 발휘, 여기까지 이끌어 왔다.


직원 120명의 “브릴리언트”는 이제 “나스닥(NASDAQ) 상장”이라는 마지막 고개만 남았다. 내가 자식에게 보태 준 것이 한 푼도 없다 보니, 그 “티셔츠” 아이디어라도 조금 한몫했다고 믿고 싶다. 하지만 열 배나 더 큰 물에 가서 --- 즉, 회사 가치가 1억불 되면 “성공”이라 일컫는 시카고에 비해, 최소 10억불은 돼야 “성공”으로 쳐주는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 티셔츠는커녕 찌라시 한 장 안 돌리고도 1등을 한 Sue. 그렇다면 두 대회에서 공히 Sue의 아이디어와 발표가 뛰어났던 것이지, 나의 “티셔츠”는 큰 기여를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설마설마했는데 진짜로 “무일푼”이 수억(數億) 달러 되는 것을 나는 지난 10여 년 내 눈으로 직접 봤다. 흔히 우리가 아는 “사업”에서는 이런 계산이 안 나온다. 따라서 내가 보기에 벤쳐는 사업이 아니다. 사람 보는 눈 있는 사람이, 사람을 잘 골라, 사람 사는 세상을 보다 편리하고 윤택하고 풍요롭게 만들고자 하는 몸부림이다. “사업”은 그 맨 끝에 부산물로 따라오는 것이다. “벤쳐는 곧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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