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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될 사람, 안 될 사람

by 김지민

2024년 6월 16일 >>>


마흔 두 살이 되던 2001년, 나는 5년 반 열심히 일했던 증권회사를 나왔다. “바이 코리아” 열풍 뒤에 휘몰아친 대량해고의 한파에 나도 된 서리를 맞은 것이었다. 그 1년 뒤, 나는 오랫동안 꿈꾸던 “내 회사”를 차렸다. 약간의 우려가 있었지만, 용기를 내어 내 전재산과 어머니 돈, 투자자들의 돈 해서 총 30억으로 투자일임회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우려가 고스란히 현실이 되면서 꼭 3년 만에 절반을 까먹고 2005년에 회사를 정리했다. 어머니께 제일 큰 손해를 끼쳤고, 내가 그 다음 큰 피해를 자처하며 남은 반(半)은 그냥 투자자들에게 돌려줬다. 그 후 7년, 많은 아이디어를 내 봤으나 다 허사였다. 2012년에 잠시 취직했던 회사도 곧 망했다. 이렇게 46세부터 53세까지, 나는 정확히 왜 망했는지, 무엇을 어떻게 달리 했어야 했는지, 아무런 깨달음도 배움도 없이 세월만 허비하며 실업자 생활을 했다.


그 이듬해 2013년 초 어느 매서운 겨울날 새벽, 그 추위를 다 녹이는 따뜻한 기별이 왔다.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브릴리언트(brilliant.org)”를 창업한 우리 딸이 내게 번역, 출제, 교열(校閱) 등을 도와 달라고 부탁해 온 것이었다. 아내는 이제 매달 월급이 들어온다며 춤을 추었고, 난 즉시 온라인 고용계약서에 사인했다. 2005년에 내 회사를 접을 당시 수연이가 1년간 내 밑에 인턴으로 있었으니, 8년 만에 사장이 직원으로, 직원이 사장으로, 서로 자리바꿈을 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긴 명절 연휴에 문 걸어 잠그고 마작을 하면, 명절 끝나고 주인과 주방장이 뒤바뀌기도 한다더니, 꼭 그런 모양이었다. 임시로, 그냥 잠시 도와 준다며 합류한 것이 벌써 12년째다. 자식이 아니었으면 나는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상상과 위기의식이 늘 나를 자숙하게 만든다. 자식이 거꾸로 나를 키우고 가르쳤다.


그 3년 전, 2010년의 그 참담했던 날이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아내도 자주 그날 얘기를 한다. 우리 부부와 수연이는 그때 시카고대학 북쪽 53가 쪽에 따로 살았는데, 늦은 오후에 만나 캠퍼스를 산책하던 중이었다. 당시 아들 도근이는 그 전년에 갔어야 할 대학을 집에 돈이 없어 못 가고, 대신 뉴욕 주 로체스터(Rochester)의 조그만 그래픽 디자인 회사에 취직해 있었다. 박봉에 먼 객지에서 얼마나 배가 고팠으면 하루는 한국 식당에 가서 순두부와 갈비, 이렇게 2인분을 시켰다고 한다. 주인 아주머니가 다 먹을 수 있겠느냐고 물었고, 네, 다 먹을 수 있어요 하고 먹는데, 얼마나 좋았던지 "입은 활짝 웃고 있는데 눈에서는 눈물이 뚝뚝 떨어지더라” 하던, 그런 암울한 시절이었다. 조금 앞서 걷던 내가 이상한 느낌에 뒤돌아보니, 아내가 걸음을 멈추고 딸에게 언성을 높이고 있었다.


공부를 빡세게 시키기로 소문난 시카고대학은 학기(semester)제가 아닌 쿼터(quarter)제다. 다시 말해, 가을/봄 학기 중간에 “정규 겨울학기”가 하나 더 있어, 1년에 3학기를 한다. 그런 가운데 우리 수연이는 내 회사에서 인턴 경험 쌓는다고 1년, 또 용한 침쟁이 할아버지한테서 침술 배운다고 1년, 이렇게 2년을 휴학했었다. 따라서 2010년 초에 시작하는 겨울학기와 그 뒤 봄학기, 이렇게 두 학기를 더 해야 학부를 마치게 돼 있었다. 그리고는 졸업하면 학부 4년간 공들여 준비해 온 “의과대학 진학”을 마침내 하게 되는, 그런 상황이었다. 흥분한 아내를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데, 그 음성이 점점 더 높아지는 것이 좀 불길했다. 그러더니 갑자기 “나는 이런 돈 필요 없다!” 하고 소리치며 무슨 지폐를 한 주먹 땅에 내동댕이치길래 급히 뛰어갔다.


돈을 줍고 아내를 진정시킨 뒤 들어본 사정은 이랬다. 결혼 패물도 다 팔았고, 일시불로 받았던 당신 국민연금도 점점 바닥나고 있다. 당신 신경쓸까 봐 말을 안 했는데, 수연이가 우리 사정을 알고 매월 몇 백 불씩 생활비를 보태 왔다. 학교 실험실 비품도 관리하고, 친구랑 회사 차려서 홈페이지 제작도 해 주고, 또 휴가 떠난 교수님 댁 고양이 밥도 주는 등, 공부도 바쁜데 틈틈이 아르바이트를 많이 했다. 그런데 작년부터 벤쳐 운운하더니 글쎄 이제는 휴학하고 아예 그쪽으로 나선다고 한다. 그래서 엄마는 이런 돈을 원하는 게 아니라, 니가 공부를 많이 해서 훌륭한 의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설득하는 중이다. 그런데 수연이는 “시카고대학은 10년 뒤에도 이 자리에 있지만, 이 기회는 지금 놓치면 영원히 안 온다”고 하면서 계속 고집을 피운다는 것이었다.


좀 더 들어보니 대세는 기울어 있었다. 수연이는 겨울학기 등록도 안 했고 이미 공부는 접은 상태였다. 오히려 300개 회사 중에 10개를 선발하는 “벤쳐 대회”가 얼마 뒤에 있는데, 거기 뽑히려면 준비할 것도 만날 사람도 많으니, 엄마 아빠는 매일 여기저기 차를 좀 태워 달라고 했다. 따져 보니 충분히 아내가 비명을 지를 만했다. 실직자 남편은 희망이 없어 뵈지, 아들은 대학도 못 가고 취직을 했지, 기대했던 딸은 공부 때려치우고 땡전 한 푼 없이 사업을 한다 하지...... 누가 봐도 우리는 달콤한 “어메리칸 드림(American dream)”을 꿈꾸고 있는 게 아니라 끔찍한 “어메리칸 나잇메어(American nightmare)”에 시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길가는 사람 천 명을 붙잡고 물어봐도 그 같은 상황에서 누가 “브릴리언트(brilliant.org)” 비슷한 것이라도 점치는 이가 있었을까? 아마 하늘도 거기까지는 아직 계획에 안 두셨으리라.


어차피 엎질러진 물, 그리고 딱히 대안도 없고...... 따라서 우리 부부는 그 이튿날부터 박사 출신 운전수, 석사 출신 조수로 변신했다. 모시는 분은 24세의 “Sue (수)”라 이름하는 최종학력 고졸의 예쁘장한 한국 여학생. 누굴 만나 무슨 얘길 하며 무슨 준비들을 어떻게 하는지 모르지만, 우리는 매일 VIP의 분부대로 차를 몰았다. 내려 드리고 한참 기다렸다가 나오시면, 또 다음 행선지로 모셨다. 눈에 뵈는 것, 손에 잡히는 것이 도무지 아무 것도 없었기에, 나는 몇 번이나 “수연아, 젊을 때 고생은 사서도 한다. 혹시 잘 안 돼도 너무 실망하지 마라.” 하며 미리 방패막이 겸 위로를 했다. 그러나 그럴 때마다 나는 어김없이 한없는 무시를 당했다. 왜냐하면 한 번도 대꾸를 안 했으니까. 그리고 그것은 그 후 십수 년 세월에 겪게 될 많은 수모 중의 제1탄에 불과했음을 내 어찌 알았으랴.


그러던 어느 날, 수연이는 자기들이 최종 10개 회사에 뽑혔고, 시카고 어느 벤쳐 빌딩 한 층에 자기 회사 칸막이도 생겼으며, 매월 경비도 지원받는다고 했다. 벤쳐 세계에 공식적으로 입성한 것이었다. 눈치 없다고 늘 야단 맞는 내가 대뜸 물었다. “니가 잘 안다는 그 시카고대학 비즈니스 스쿨 교수님이 신경 좀 써 주신 거 아이가?” 그랬더니 수연이는 예/아니오 대신 이렇게 내 궤변을 일축했다. “아빠, 전에 제가 사람들 만나고 다닐 때, 벤쳐 대회 심사위원(judge) 열 명도 개인적으로 다 만났어요.” 무안해서 거기서 더 이상 대화를 못 잇고 나중에 아내한테 들은 바는 이랬다. 대회 때 달랑 시간 5분 주면서 당신 비즈니스 아이디어를 말해 보라 하는데 거기서 무슨 수로 심사위원들을 설득하느냐, 따라서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한 사람 한 사람 미리 다 설득을 시켰다, 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우리는 차도 몰아 주고 심부름도 하다가 2011년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년 뒤, 그간에 시카고에서부터 실리콘밸리로까지 크게 도약한 딸이 “브릴리언트(brilliant.org)”를 세우고 일자리를 주어 7년간의 내 실직 생활이 마감됐던 것이다. 한때 잘나갔고 큰 성공을 꿈꾸었던 나는 한동안 내 실패가 너무 쓰렸다. 하지만 딸이 하는 것을 보면서 그 실패가 당연지사임을 알았다. 세상에는 될 사람, 안 될 사람이 있는데, 나는 전형적인 후자임이 비로소 눈에 보였다.


나는 한 번도 딸이 허둥대거나 목소리 높이는 걸 못 봤다. 한 마디 말도 함부로 하는 걸 못 봤고, 어떤 결정도 즉흥적으로 내리는 걸 못 봤고, 단 한 번도 꼭 해야 할 말을 감추는 걸 못 봤다. 남 탓이나 남 욕 하는 것도 한 번도 못 봤다. 단 한 사람도 가볍게 여기는 것을 못 봤고, 1분도 허투루 쓰는 것을 못 봤고, 아무리 사소한 일도 사전계획 없이 행하는 것을 못 봤고, 단 한 가지 일도 내일로 미루는 것을 못 봤다. 초지일관 그렇게 살아 왔으니 무지 힘들기도 했으리라. 하루는 무슨 얘기 끝에 엄마에게 말했단다.


“엄마, 나 이거 처음부터 다시 하라 하면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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