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라는 애매한 타인
글을 시작하기 전,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 미리 남긴다.
이 글은 화목한 가족을 두고 비난의 시선을 갖고 있거나, 지나치게 다투는 가족에게 비난을 하거나 하는 등의 글이 아니다. 그저 ‘나’의 경험을 토대로, 많은 가족 간의 감정 소모로 지쳐있을 누군가에게 하는 고요한 위로의 글로 읽어주면 좋겠다.
부모, 효, 가족, 사랑 등의 단어들로 우리나라는 가족만의 ‘끈끈함’을 강조하곤 한다. 결혼도 서로 사랑하는 두 남녀가 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족 간의 결합이라는 개념이 적지 않게 내포되어있다. 그럴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게 정말 정일까?’하는 생각이다. “가족이니까.”, “형/누나/오빠/언니/동생이니까.”라는 말로 각자는 서로를 위해 포기하기도 하고 다투기도 한다. 이것이 지나친 감정 소모로 이어지면, ‘그래도 가족이니까.’라는 말로 포장되어 언젠가 다시 뜯을 포장을 예쁘게 고이 접어 재포장한다. 그렇게 포장지가 너덜너덜해진 대한민국의 가족은 얼마나 있을까. 그것이 예쁜 포장이든, 나쁜 포장이든 오랜 시간을 거쳐 ‘포장된 가족’은 분명 많을 거라 생각한다.
나는 1녀 2남의 남매 중 1녀로, 장녀이다. 두 동생들과 함께 살아오면서 많은 것을 포기하고, 내려놓고, 어쩔 때는 크게 다투기도 했다. 물론 동생들도 그랬을 것이다. 날 위한 배려와, 때로는 날 향한 억울함과 분노도 있었겠지. 그렇게 다툴 때마다 끝마무리는 항상 “누나니까.”, “동생이니까.”라는 말로 점철되곤 했다. 이런 식의 포장은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이를 깨달은 것은 안타깝게도 얼마 전이었다. 가족 내의 역할로만 서로를 바라보고,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서로를 향해 비수를 던지기 쉬워졌다. 싸움의 끝을 역할로 마무리지었다면, 이제는 그 역할을 조금이라도 수행하지 못할 때 오는 비난이 더욱 커졌다. 결국 다툼은 서로에 대한 불만족 토론의 장이 되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각자가 갖고 있는 가치관이나 관점, 그리고 역할로서의 ‘최소한의 선’이 서로 달랐기에 피할 수 없는 감정이고 다툼이었다. 서로를 헐뜯고, 역할과 존재감 자체에 대한 단점을 서로에게 퍼붓고 나면 해결되는 것은 없었다. 서로를 향한 증오와 자신에 대한 죄책감만이 남아 또다시 좋지 못한 기억이자 가족으로의 포장으로 남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처음부터 서로를 헐뜯기 위해 다투었던 걸까. 서로를 깎아내리기 위해 모진 말을 하고 감정 소모를 했던 걸까. 그건 아니다. 제법 사이좋은 여느 가족들처럼 사진도 많이 찍고, 서로 간의 연합도 수월했다. 서로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노력했고, 서로를 배려하려 애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서로를 위한 일을 잘못짚거나, 배려에 대한 만족도가 충족되지 못할 때의 일에 대해 불만을 털어놓게 되었다. 그리고 그 불만을 털어놓는 방식의 첫 단추를 단단히 잘못 꿰었던 것 같다. 어찌 보면, 완벽히 서로 다른 사람들이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겨우 뭉쳤던 것일 수도 있다. 사회에서는 전혀 마주치지 않을 사람들이었는데,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만난 인연.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가 왜 그렇게 다투고 냉전이 되었는지 이해가 쉽다. 이와 같은 가정(if)을 세운다면 완벽히 다른 사람들에게 다투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라는 부모님의 말씀은 애초에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이고 요구였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어떠한 배려를 했어도 다툼과 갈등, 어색함, 그리고 냉전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만일 우리가 조금 더 일찍 ‘완벽히 서로 다른 사람’ 임을 깨닫고, 사회 속에서 마주하는 사람처럼 최소한의 예의나 매너를 지키고 살았다면 어땠을까. 듣기 싫은 부장님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거나 빠지고 싶은 회식 자리에 사람 좋은 얼굴로 앉아있는 것처럼. “사회 속 남”처럼 서로를 대했다면 어땠을까. 겉으로라도 행복한 가족을 지키고 있었겠지. ‘겉으로만 행복한 가족이 무슨 소용이야?’ 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완벽하게 서로 다른 가족들에게는 그것이 행복한 가족이지 않을까 싶다. “사회 속 남”보다는 나은 “남”일 테니, 힘들 때 “완벽한 남”보다는 “애매한 남”을 찾는 게 더 낫지 않을까.
사람 사는 게 다들 거기서 거기라고 하지 않는가. 나는 우리 가족처럼 분명히 어딘가의 가족도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을 것이라고 본다. 부모님이든, 형제자매든, 친척 사촌이든, 물리적으로나 유전적으로나 가장 가깝다고 하더라도 서로의 관점과 이해관계는 모두 다르다. 완벽히 다를 수도, 조금은 비슷할 수도 있다. 그러니 다투는 가족이 있다면, ‘화해해라’, ‘가족이니까’라는 등의 말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들은 완벽히 다른 타인이다. 그저 ‘한 피’라는 이유로 서로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배려와 감정 소모를 할 필요는 없다. 완벽히 다른 타인. 같은 피라고 형누나오빠언니동생이 ‘나’가 될 순 없지 않은가. 최소한의 이해와 최소한의 배려만으로도 한 지붕 아래 살 수 있다. 나도 그들에게 “애매한 남”이고, 그들도 내게 “애매한 남”임을 기억하자. 서로를 향해 헐뜯지도, 자신에게 죄책감을 느끼지도 말기를 바란다. 드라마 속 화목한 가족을 보고 왜인지 모를 씁쓸함을 느끼지 않아도 된다. 세상에 가족은 많고, 가족의 형태는 다양하니까. 그러니 너무 마음 쓰지 말자. 각자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자. 무대포 같은 화해와 어거지로 끼워 맞춘 화목보다, 느슨하고 애매한 고요가 더 좋을 때도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