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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진 Apr 03. 2024

사회복지사의 탈시설 운동

사회복지사의 자기 밥그릇 차기

사회복지 공부를 하던 대학시절 그리고 졸업하여 취업을 고민하면서 "사회복지시설"이란 복지의 모든 분야에 있어 당연한 기본값이었고 졸업한 이후 우리들의 일자리였다. 아동복지에 있어 아동양육시설(고아원), 청소년복지는 청소년쉼터, 노인복지면 양로원, 장애인복지면 장애인시설. 이런식으로...

법적근거를 가진 시설들은 대부분 정부지원금으로 운영되는데, 그렇기에 비교적 안정적 직장에 속하고 모두 합친다면 어마어마하게 많고 다양한 수의 시설들이 전국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런 시설들은 크게 분야를 막론하고 이용시설과 생활시설로 나뉜다. 복지관이나 지역아동센터, 청소년수련관처럼 그 시설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이용하도록 하는 시설이 이용시설이며, 숙식을 포함한 일상생활을 하며 사는 곳이 생활시설이다. 

대학 졸업 후 나는 한번도 생활시설에서 일했던 적은 없다. 생활시설은 24시간 운영되기 때문에 근무조건이 열악한 경우가 많아서 사회복지사들의 선호 직장은 아니었다. 그나마 이용시설도 복지관에서 잠시, 자활지원센터에서 잠시 근무한 것이 전부이고 대부분을 나는 정부지원이 없는 민간복지단체에서 일했다. 그렇게 정부 지원 복지시설과는 먼 곳에서 20년 넘게 일하면서 시설쪽 사람들과도, 이슈와도 다소 거리가 있는 일을 해왔다. 


사회복지시설에서 직접 사람들을 만나지는 않았지만 오랫동안 사회복지 활동을 해오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한명 한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노력해왔다. 위기 상황에 처한 청소년을, 아동을, 가정을 지원하는 일을 고민하다 보니 결국 한명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고, 사회가 변화하지 않으면 우리가 하는 일은 밑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이될 수 밖에 없겠구나. 하는 생각에 도달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의 활동은 개인의 변화를 넘어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우리 사회가 오랫동안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대안으로 마련해 온 "시설"이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아동복지시설의 대표적인 "고아원_아동양육시설"을 생각해보자. 전쟁 때 발생한 수많은 고아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대규모 거주시설인 "고아원*"이 생겨났다. 그래서 많은 아동양육시설들이 그때 설립되어 아직까지 운영되고 있어 설립연도가 1960년대인 경우가 많다. 대부분 시설당 수백명의 아동을 수용하도록 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그렇게 인원이 차지 않지만 말이다. 그 후 6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났다. 이제는 전쟁고아도 없고 한국사회는 초고령화 사회가 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사회는 아직도 보호자가 양육할 수 없는 아이들을 "시설"에 보낸다. 

이런 대규모 시설 수용의 방식은 대부분 전쟁시기에, 사회복지 아주 초창기에 빈민을 케어하기 위한 원초적인 방식이었고, 그 이후 사회가 발전하며 자연스럽게 없어진 형태이다.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아이들은 가정적인 환경에서 성장하도록 해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복지선진국에서는 입양이나 가정위탁 형태로 전환되었고, 전문적인 케어가 필요한 일부의 경우 소규모 가정형태를 띈 시설을 운영하도록 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는 (지금은 없어졌으나 아직 없어지지 않은) 호주제 때문인지, 혈족을 중시하는 유교문화 때문인지 유독 입양과 가정위탁이 발전되지 못하였다. 그러면서 아동인구가 부족한 것이 심각한 사회 문제가 된 지금에도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시설에서 보호하는 아이러니가 지속되고 있다. 

그렇게 지역사회 안에서 아이들이 성장하는 것이 아니라 시설이라는 특수한 환경에 구분지어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을 살게 하고 우리는 거기에 자원봉사를 하러 간다. 아이들 뿐만 아니라 시설에 사는 사람들을 "불쌍한 존재"로 만들고, 우리는 "선행"을 하는 사람들로 그들과 구분짓는 것이다. 어느 누가 남의 선행을 받고, 그것에 고마워해야 하는 존재로 살고 싶겠는가. 그들이 우리가 살고 있는 지역사회 안에서 우리와 똑같은 시민으로, 주민으로 살 수 있고, 지역사회 안에서도 불편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마땅히 정부와 사회가 해야 할 의무이다. 아동, 노인, 장애인 모두 마찬가지다.  

아동양육시설에서 18세 성인이 되면 퇴소를 하여 자립해야 하는 "자립준비청년**"의 문제에 최근 사회가 많이 공감하고 대안을 만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데 여러 정책적 대안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자살하는 청년들이 생기는 것은 왜일까? 그건 18세 자립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지역사회 구분된 시설에서 자라온 이전 단계 삶의 문제인건 아닐까? 개인의 삶의 네트워크가 전혀 없이 시설에 속해 있다가 시설을 나서는 순간, 사회에 아무런 연고도 끈도 없는 고립된 존재가 되는 것이 문제인건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의 대안은 시설 퇴소 이후의 지원을 확대하기 보다 근본적으로 시설이라는 기본 전제를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여러 당위에도 불구하고, 처음 "탈시설"이라는 용어를 접했을 때의 거부감은 오랫동안 사회복지의 "기본값"으로 생각해온 시설을 부정하는 것이 어려웠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사회복지사인데, 내가 내 밥그릇을 차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전국 수천, 수만의 시설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를 적으로 삼는 것인가? 하는 두려움마저 일었다. 하지만 사회복지사는 내 밥그릇과 일자리를 고수하기 위해 이 일에 뛰어든 사람들이 아니다.(라고 믿는다.) 우리가 만나는 아동, 청소년, 가정, 장애인, 노인 등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잘못도 아니고 원치도 않은 어떤 환경, 장애, 문제들로 인하여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문제를 함께 해결하고 그들과 함께 살아내는 사람들이다. 탈시설이 된다고 해도 우리의 일터가 시설이 아니라 지역사회로 옮겨졌을 뿐, 그것이 그들에게 더 좋은 방식이라면 사회복지사들에게도 더 좋은 방식이 될 것임에 분명하다.  


사회복지 탈시설 운동이 장애쪽에서는 이미 많이 진전이 되었다. 장애인 당사자들과 탈시설 운동을 함께 펼쳐온 여러 시민단체들의 엄청난 노력의 결실이다. 없는 길을 만들었으니 정말 얼마나 힘들었을것이며 얼마나 존경스러운지! 나는 거리 청소년의 주거대안을 마련하는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이란 곳에서 활동하며 아동탈시설 운동을 하고 있다.(역할이 미미하여 이렇게 쓰기도 민망하지만)

이런 탈시설 운동이 절대로 시설에서 헌신을 다해온 사회복지사들을 부정하는 일임이 아님을 말하고 싶다. 장애쪽에서도 시설에서 일하던 분들이 지역사회 자립지원센터 사회복지사로 주거코디로 다양한 역할로 일하고 계시다. 누구보다 시설의 문제와 한계를 잘 알고 있는 것은 시설에서 일하시는 분들일 것이다. 탈시설 운동이 외부에서 시설을 공격하는 것이 아닌, 시설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가장 큰 목소리로 이러한 대안을 주장하는 날이 어서 오길 바라면서...!

  




*이제 고아원이라는 명칭은 사용하지 않는다. 정확한 법적 용어는 "아동양육시설"이다. 

**이전에는 "보호종료아동"으로 불렸으나 "자립준비청년"이라는 명칭으로 변경됨. 

#사진출처 : 청소년주거권네트워크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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