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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흥진 Feb 28. 2024

악기는 사치품?

아니, 내 인생의 숨 쉴 구멍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복지사업이 있다. 공부를 가르쳐주거나 학용품 등의 물품을 주거나 영양식을 지원하는 등등. 내가 일하는 단체는 아이들에게 악기레슨을 지원하고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참여시켜 년 1회 연주회에 서게 하는 사업을 한다. 이 사업을 설명하며 후원을 요청하면 다들 "너무 좋은 사업이네요. 근데 우리 애들도 악기를 못 배우는데..."라는 반응이 많다. 악기, 특히 우리가 가르치는 관악기는 클라리넷, 플루트, 트럼펫, 색소폰 등으로 쉽게 배우기 어려운 악기이고 악기 가격도 레슨비도 만만치 않다. 긴급하거나 생계와 연관이 있지 않은데 심지어 고가라 사치품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관악기 종류


맞다. 사실 아이들은 기본적으로 저소득 가정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고, 때론 이주민 가정이라 불안정한 거주, 사회적응 등의 문제에, 때론 아동학대 상황에, 때론 가족의 질병과 장애로 인한 어려움에 처해있다. 그런 아이들 가정에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국가 사회보장의 몫이 크고, 부모의 경제적 문제 해결은 아이들의 몫이 아니기도 하다. 긴급한 생계를 지원하거나 물품을 지원하는 곳은 우리가 아니더라도 많다. 공부를 가르쳐주려는 곳은 더 많다. 단지 아이들은 지금 가정적으로 어렵고 불안정한 상황에서 공부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다. 

학교에서 적응하지 못해서 겉돌고, 마음은 불안한데 어떻게 표출하지 못하고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해서 방황할 때, 아이들이 악기를 불었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다. 아무 생각 없이 악보와 악기 연주에 빠지게 되어 힘듦을 잊기를 바라고 그렇게 만난 음악이 친구가 되고 치유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일반(?) 가정 아이들에게 음악이 고급스러운 취미활동이라면 우리가 만나는 아이들에게 음악과 악기는 때론 내 인생에 부여잡고 싶은 하나의 희망이고 숨 쉴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이기도 한 것이다. 


처음 아이들이 악기를 접하면서 "신기한 물건"을 만난 설렘으로 참여한다. 대부분 아이들이 이런 악기는 처음 봤다고 한다. 관악기들이 흔치 않기 때문인데, 현악기보다 관악기가 좀 더 실력이 금방 늘고 무대에 설 때도 효과가 좋아 관악 오케스트라로 시작을 했다. 물론 악기는 좀 비싸고 음악강사 풀도 적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음악과 좀 더 쉽게 친해질 수 있는 악기라고 생각했다. 나도 이 사업을 시작하며 클라리넷을 처음 배우기 시작했는데 나에게도 새로운 악기였고 악보를 따라 손가락 운지를 생각하며 레슨을 받을 때면 수많은 잡념이 사라지는 시간이다. 

그렇지만 매주 무념무상 열심히 악기를 불다 보면 어느새 슬럼프가 찾아온다. 실력은 도통 늘지 않는 거 같고 내 소리는 안 이쁘며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라는 시기인데 그때를 넘기는 방법은 음악캠프이다. 아이들이 가장 좋아하는 캠프! 수영도 하고 레크리에이션도 있지만 2박 3일의 시간을 레슨, 합주, 레슨, 합주만 계속한다. 집중훈련을 마치고 나면 마지막 날 밤에는 지역 주민들을 모시고 작은 음악회를 연다.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이들 실력을 훌쩍 성장해 있고 이제 정기연주회를 향해 달려가는 일만 남았다. 

정기연주회는 1년에 한 번 큰 무대에 서는 결실의 날이라고 볼 수 있는데 우리는 최대한 큰 무대, 유명한 연주자와의 협연, 게스트로 셀럽 초대를 하여 단원 아이들의 자부심을 한껏 높여준다. KBS홀이나 세종문화회관, 성남아트센터 등의 콘서트홀 등에서 연주하고 지역의 오케스트라들은 지역 예술의 전당을 대관한다. 뮤지컬 배우, 전문연주자, 발레리나, 성우 누구든 섭외가 가능하다면 협연자로 사회자로 함께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연주회는 50여 명의 아이들이 소리를 맞춰 곡을 만들어 간다는 짜릿한 전율을 느끼는 시간이다. 

"꺅!! 선생님, 그 곡 연주할 때 소름이 쫙 돋았어요."

라는 얘기를 하는 애들(전율을 느끼는 곡과 포인트는 아이들마다 다 다른 것 같다.). 연주회가 끝나고 나서 아이들의 표정을 보면 그날의 무대가 아이들에게 얼마나 인생의 큰 영향을 주는 것인지 알 수 있다. 

정기연주회 모습 / 함께걷는아이들 제공

그렇게 연주회를 마치면 1년의 일정이 지나고 잠시 정비를 하는 시간을 가진 후 다시 단원 신청을 받아 신규 단원을 받고 기존 단원들은 재입단을 하며 다시 1년이 흘러간다. 그렇게 사업을 진행한 지 10년이 넘었다. 처음 중학생으로 사업에 참여한 아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군악대로 다녀오고 어엿한 직장인이 되어(혹은 결혼하고 애를 낳아) 서른이 넘었다. 졸업한 아이들이 많아져 졸업생들의 오케스트라를 별도로 만들었다. 졸업생과 일반 성인 취미 연주자들이 함께 단원으로 활동하는 동아리인데, 나도 거기에서 단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들도 나이가 들어가고 이제는 같은 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친해지면서 언니(누나), 동생 같은 관계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아이들과 술 마시며 옛날 얘기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내가 몰랐던 아이들의 연애 얘기나 캠프 때 몰래 술 마신 얘기 등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직접 아이들을 통해 듣는 기분이란! 


한 번은 이제는 20대 후반이 된 졸업생 친구와 긴 얘기를 할 일이 있었는데, 자세히 몰랐던 자기의 힘든 어린 시절 얘기를 털어놓았다. 너무 고생이 많았겠구나. 어떻게 그렇게 힘든 일이 한꺼번에 어린 시절이 다 닥칠 수 있었을까 마음이 아픈데, 그 얘기 끝에 오케스트라 사업 얘기가 나온다. 자기가 시골에서 엄마 아빠 다 돌아가시고 친척집으로 위탁이 되어 서울로 갑자기 올라오게 되었는데 서울도 낯설고 학교도 낯설고 집도 낯선 가운데 동네 지역아동센터를 다니게 되었단다. 거기서 자기가 너무 적응을 못하고 있으니 선생님이 악기를 해보지 않겠냐며 처음으로 악기를 만져보게 되었는데, 악기를 불 때만 살아있는 것 같았단다. 자기의 해방구였고, 악기를 불 수 있는 시간만 기다렸다고 한다. 공연 무대에 서서 조명을 받고 박수를 받던 기억을 평생 잊을 수 없다고. 오케스트라를 하며 마음의 안정도 찾고 친구도 만나고 서울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고. 

오케스트라 사업의 성과를 다양한 척도로 측정하고 인터뷰를 통해 아이들 변화 스토리를 듣고 정리하는 일을 수없이 해왔는데 그 어떤 양적, 질적 데이터보다도 나의 마음을 움직인 코멘트였다. 묻지 않았는데, 자기 인생 얘기 속에 들어있는 우리 사업의 의미를 듣게 되다니. 지난 13년 동안 오케스트라를 짧게는 1년 길게는 6,7년씩 거쳐간 아이들이 4,000명이 넘는다. 우리는 다 알지 못하지만 얼마나 많은 아이들의 인생에 악기와 음악과 합주와 무대가 준 치유의 힘이 있었겠는가!!!   


물론 모든 아이들에게 음악이 치유가 되고 선물이 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아이에게는 체육활동이, 어떤 아이에게는 미술활동이 아동 청소년기에 이런 숨 쉴 구멍이 되어준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긴급한 물품, 생계 지원만이 아니라, 공부 잘하게 하는 학습지원만이 아니라, 이 험난한 세상을 살아갈 힘을 키워 주는 그 어떤 다른 것이어야 한다. 악기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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