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팀
우리가 처음 임신한 지수(가명)네 집을 방문한 것은 지수의 코로나 격리가 해제되자마자였다. 만삭이었던 지수가 코로나에 걸렸고, 어떻게 지내는지 걱정이 되던 중에 격리가 해제되고 장애 활동 보조인이 방문을 했더니 지수가 너무 창백하게 누워 깨워도 일어나지 않아 119에 전화를 했다. 출동한 구급대원이 지수의 핸드폰 최근 통화 내역을 눌렀을 때 걸린 전화가 현미씨였다. 지수와 가까운 곳에 살던 현미는 출산이 다가오고 있는 지수에게 뭘 도와줘야 할지 물으며 교회에서 마침 서로의 번호를 주고받은 상태였다. 구급대원의 전화를 받고 얼마나 놀랐을까? 현미가 이 일을 목사님께 의논했고 둘이 같이 방문을 가자고 날짜를 잡은 상태였다. 나는 딱 그 타이밍에 교회에서 지수를 애써 모르 척하다가 더 이상 그럴 수 없어 목사님께 전화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현미와 목사님과 나, 세 명이 처음으로 지수네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 후 우리 셋은 자연스럽게 역할분담이 되었다. 직장으로 보자면 목사님은 대표이사, 나는 행정실장, 현미는 사업담당 과장이랄까? 대표님은 중요한 일에 나섰고, 자잘한 일들은 우리끼리, 중요한 일은 대표님께 보고되었다. 실장인 나는 주로 행정처리 관련된 일을 맡았다. 사회복지와 연관된 일이 많다 보니 앞에 쓴 글들처럼 시청 사회복지담당, 병원 의료사회복지사 등 다양한 지원처에 지원을 알아보고 연결하는 일들을 담당했다. 과장님은 지수를 지원하고 챙기는 실질적인 일들을 주로 맡게 되었다. 지수네 집을 오가며 자주 방문했다. 필요한 게 눈에 들어오면 어떻게 그걸 채워주면 좋을지 고민했다. 그러한 과장님의 제안과 선의는 처음엔 대부분 커트당했다. 예를 들면 이런 거다. 만삭인 청년이 침대 없이 바닥에서 생활했다. 늘 집에 이불이 깔려있어 불편하고 비위생적으로 보였다. 나는 사회복지를 오래 해와서 그것보다 심각한 상황의 집도 많이 보았다. 외부인이 그런 상황에 섣불리 개입하는 것이 상황에 큰 변화를 주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현미보다 객관적 입장에 거리를 두고 싶어 하는 쪽이었다. 하지만 현미는 함께 비용을 분담할 사람을 구해서 침대를 사주겠다는 제안을 한다. 하지만 지수는 야뇨가 잘 조절되지 않아 침대 매트를 쓰는 것은 오히려 관리가 안되고, 그 집은 오래 살 곳이 아니라서 그렇게 큰 짐을 들이는 것도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갔다. 하지만 현미는 계속해서 지수의 사정과 컨디션을 살피고 챙겼고, 뭐가 필요하고 뭐는 안되는지를 점점 더 잘 알아갔다. 대표님이 어느 날 과장의 업무가 너무 과중해 보였는지, 과장 한 명을 더 채용했다. 굉장히 현명한 판단이었고, 당시 교회 여자교인 모임의 회장을 맡고 있는 시원씨였다. 대표님을 빼고 실무진 세명은 점점 똘똘 뭉쳤다. 우리 셋으로는 부족해 교회 내에 지수네를 도와줄 팀을 꾸렸다. 그리하여 대표님 밑에 실무진 3명, 자원봉사자 10여 명의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
어렸을 때 시설에 버려져 장애 시설에서 스무 살이 될 때까지 살아온 지수의 삶은 어떤 삶이었을까? 나는 이전 직장에서 사회복지시설 평가단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전국의 수많은 시설을 방문해 봤다. 아동시설, 노인시설, 장애인시설. 장애인시설은 인권 실태 조사로 방문했었는데, 그래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 그저 의식주를 해결하고 숨 쉬고 있는 것만으로도 버거워 보였던 장소. 보호자의 일상을 위해 이 시설이 필요한 건가? 생각했던 곳으로 기억되고 있다. 지수가 있었던 장애인시설과 그 경험을 알 수는 없지만 따뜻하고 활기찬 기억은 아닐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런 지수에게 현미는 참으로 따뜻한 물, 온수 같은 사람이다. 옆에 같이 있으면 진심으로 청년과 아이를 걱정하고 있는 게 그대로 전달이 된다.
지수는 밥을 잘 안 먹는다. 반찬을 챙겨놔 줘도 꺼내먹지 않으니 그러면 나는, ‘배달이 답인가..?” 생각한다. 내가 개입하지 않아도 식사를 해결하는 방법을 고민하는 반면, 현미는 한 끼라도 집밥을 더 먹이기 위해 노력한다. 지수가 출산하러 병원에 들어간 날, 나는 출산 이후 스케줄과 걱정들만 가득했다면 현미는 (우리의 친정엄마들이 그러하듯) 집밥을 먹어야 힘내서 아이를 낳는다며 입원 전 마지막 밥을 자기 집에 와서 먹으라며 상을 차리는 사람이다. 지수와 아기를 데리고 첫 병원 외래 진료를 갔던 날. 진료 마치고 점심 먹을 식당을 찾다가 그 동네 사는 현미에게 식당을 추천해 달라고 얘기했더니 “애기 데리고 가기 마땅치 않으니 저희 집에 와서 드세요.”라고 나를 감동시키는 사람이다.
엄마라는 존재의 체온을, 가족을 느껴보지 못했을 지수에게 현미는 찬물에만 몸을 담갔던 사람이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는 그런 느낌의 사람이 아닐까?
지수네가 지역사회 온 이 이후 여러 수고 끝에 오전의 장애활동지원사, 어린이집, 오후시간 아이 돌봄이 세팅되었지만 아기와 지수는 병원 갈 일도 잦았고, 주말의 공백도 있었다. 그중 특히 큰 일들이 몇 번 있었는데 아기가 수술을 받거나 추석의 긴 연휴 등이 그것이다. 대표님이 우리 팀에 충원해 준 시원이는 현미처럼 자잔한 따뜻함보다 묵묵한 든든함이 있었다. 아기가 수술하러 가는 병원 입원에 시원이 동행했는데 만나기로 한 시간이 돼도 오지 않더란다. 집으로 갔더니 그 전날 밤늦게까지 이유식을 만들겠다고 지수가 어마어마한 양의 고기와 야채를 다져놓았고(분량 조절에 실패했고, 밤새 그것들을 다졌다고 한다.) 집은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고 한다. 일단 부랴부랴 같이 짐을 싸서 입원을 시키고 혼자 다시 지수네 집으로 와서 음식 재료들을 다 치우고 방 정리에 화장실 청소까지 혼자 다 마치고 저녁 늦게 귀가하는 식이다. 병원 동행만도 힘든데 대충 하거나 본 것을 나몰라는 못하는 사람이 시원이다. 아기 입원에 동행한 탓에 아기 입원동안 병원 의료진의 모든 우려와 근심, 눈총(?)을 묵묵히 받은 것도 시원이다. 지수도 나랑 현미가 얘기하면 안 듣거나 무시하는 말도 시원이가 말하면 듣는 경우가 있어 우리의 히든카드로 쓰였으니, 지수도 시원이의 진지하고 묵직한 조언을 흘려들을 수 없나 보다.
이렇게 우리 팀은 나를 중앙에 놓고(내가 나이가 젤 많아 왕언니다.) 우 현미 좌 시원으로 누가 들어도 답이 없어 답답해 보이던 상황을 하나하나 해결해 나갔으니, 같은 교회를 다니지만 전혀 친하지 않았던 우리 셋은 지수와 아기로 인해 절친이 되었다.
우리 세명으로 벅찬 것은 교회 여성 교인 모임에서 자원을 받아서 10여 명의 자원봉사를 통해 해결했다. 우리가 소통하는 톡방의 이름을 “동네언니들”이라고 붙였다. 우리는 2주에 한번 토요일 방문조를 꾸려서 지수네 집을 방문해 같이 밥도 먹고 집의 청소, 빨래 등을 챙기는 일을 했다. 한두 명이 했으면 부담스러웠을 일들이 여러 명의 참여와 관심으로 원활히 돌아갔다. 그녀들은 모두 행정실장인 나는 따라갈 수 없는 따뜻한 마음과 숙련된 손길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동네 언니들이 수많은 지역사회 전문가들보다 훨씬 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