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한 스토리와 시골생활

- 천사의 후예가 분명한 징기 씨

by 노란하마

우리 동네에는 천사 선발 시험에서 커트라인에 걸려 아쉽게 떨어진 징기 씨가 살고 있습니다. 정확한 이름은 진기이지만 자음동화로 인해 징기로 불렀고, 그게 아예 자리를 잡았습니다. 말은 경제성 원리에 의해 편하게 소리 나는 대로 발음하기 마련이라 사람들이 하도 징기라고 하니까 원래 이름인 진기는 거의 흔적조차 없을 정도입니다. 징기, 밥 먹었냐? 저기, 징기 오네. 징기 오늘 징하다. 다 징기로 통합니다.

그런 징기 씨가 천사 시험 커트라인에 걸려 아쉽게 떨어졌다는 걸 어떻게 아냐고요? 징기 씨 행동을 보면 천사 유전자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건 억지로 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자연스럽습니다.


<수박 하우스 농사를 짓는 징기 씨>


징기 씨는 수박 농사뿐만 아니라 들깨, 옥수수, 콩 같은 작물도 키웁니다. 정신없죠. 불평 한 마디 안 합니다. 그저 일만 합니다. 연로하신 노모를 극진히 모시고 있기도 합니다. 징기 씨는 마치 자신의 일을 하듯이 다른 사람 농사를 도와주는 게 일상입니다.

<오이를 포장한 박스를 차에 싣는 징기 씨>

정씨 아저씨는 오이농사를 하고 있습니다. 기관지 확장증을 앓고 있어서 정말 힘겹게 농사를 짓고 있죠. 징기 씨가 정씨 아저씨네 일을 도와줍니다. 오이를 박스에 담아 포장하는 일을 도와주고, 그걸 차에 싣습니다. 돈을 받고 하는 게 아닙니다. 노력봉사입니다. 동네의 궂은일도 도맡아 합니다. 겨울에 동네에 쌓인 눈을 치우는 건 징기 씨 몫입니다. 어른들이 길에 미끄러지지 않게 하기 위해 연탄재를 뿌리는 것도 잊지 않죠.

하긴 이 정도의 선행은 어느 마을의 장삼이사도 할 수 있는 일이겠죠. 징기 씨가 천사 유전자를 가진 결정적인 사건 두 개가 있습니다. 하나는 오래전 젊었을 때 동네 청년 서넛이 남의 집 닭서리를 한 적이 있습니다. 시골에서는 종종 일어나는 일이고, 주인도 그러려니 하고 웬만하면 그냥 눈감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그때 청년들의 닭서리는 좀 짓궂었습니다. 닭장 문에 피 묻은 낫을 걸어두었습니다. 경찰에 신고하지 말라는 어설픈 마피아식 협박이었던 셈이죠. 오히려 그게 주인의 심기를 건드렸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했고, 이내 동네 청년들은 경찰서로 불려 가 취조를 받았습니다. 청년들은 다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CCTV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목격자가 나선 것도 아니니 범인을 특정하기 참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징기 씨 차례가 돼서 형사가 심문하기 시작했는데 아주 뜻밖의 즐거운 소리를 들었습니다. 징기 씨가 황소 같은 눈을 껌벅껌벅하면서 딱 한마디 했습니다. ‘난 국물밖에 안 먹었습니다.’ 그 말에 심문하던 형사는 한참 동안 아연실색했다고 합니다. 얼마나 소박한 자기 고백입니까. 그 말에 경찰서 형사들이 배꼽을 잡았고, 닭집 주인도 그 말 때문에 그냥 웃고 넘어갔습니다. 어찌 보면 어리숙하고 비겁한 변명으로 보이지만 날 선 신경을 말 한마디로 눅진하게 만들었으니 보통 사람의 화법은 아니었던 거죠. 징기 씨가 천사 유전자를 가진 두 번째 증거는 멧돼지 사건입니다. 징기 씨가 좋은 일을 자주 했기에 그로 인해서 상대적으로 악동으로 낙인을 찍힌 친구들이 꽤 있습니다. 동네 청년 몇 명이 노름판에 가려고 방앗간의 쌀을 터는 거랑 공사현장의 전선줄을 훔치는 정보를 사전에 슬쩍 흘려 더 큰 불행을 미리 막은 것도 징기 씨가 한 게 분명합니다. 얼마나 미움을 받았던지 청년 넷이 밤에 냇가에서 술을 마시다가 거의 충동적으로 징기 씨를 죽이려고 한 적도 있습니다. 아니 정말 죽였습니다. 술을 마신 뒤 인사불성이 된 채로 징기 씨를 삽으로 내리쳐서 죽인 뒤, 땅에 묻었습니다. 분명히 묻었다고 했습니다. 징기 씨도 죽지 않으려고 돼지 멱따는 소리까지 내면서 저항을 했고요. 근데 다음 날 아침에 징기 씨는 아무렇지 않게 빗자루로 동네 골목을 청소하고 있었습니다. 청년들은 환장하고 미칠 노릇이었습니다. 술에 취하긴 했지만 땅에 묻은 게 확실했으니까요. 세 청년은 어젯밤 징기 씨를 묻었던 곳으로 가 보았습니다. 파헤친 흔적은 전혀 없었습니다. 조심스럽게 흙은 파보니 그 안에 멧돼지가 묻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삽날로 내리친 건 멧돼지였고, 파묻은 것도 멧돼지였던 겁니다. 삽날로 내리치는 순간 멧돼지가 징기 씨를 들이박아 7m쯤 날아가 푹신한 갈대숲에 나가떨어졌고, 멧돼지가 대신 삽날 세례를 받은 겁니다. 칠흑같이 어둡고, 술에 취해 비몽사몽 벌인 일이었지만 천사의 손길이 닿았던 게 확실합니다.

사람이긴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사람 이상의 기운을 품고 있는 이들이 있죠. 징기 씨도 그런 사람입니다. 작년에 수박농사를 망쳤는데도 불평 한마디 내뱉지 않았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수박을 나눠줘서 며칠 내내 수박으로만 배를 채울 정도였습니다. 올해는 수박농사가 잘 돼서 값도 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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