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보일드 한 스토리와 시골생활

- 시골 버스 안의 철학자들

by 노란하마

<우리 동네 마을버스 >


우리 동네 마을버스에는 운전석 옆과 출입구에 빨간색 파리채가 하나씩 있습니다. 파리채의 용도는 무임승차한 파리한테 일격을 가하는 겁니다. 물론 모기나 각다귀를 후려 칠 때도 있죠. 운전기사 아저씨는 말할 것도 없고 손님들도 능숙하게 휘두릅니다.

나 홀로 손님인 빈차를 타고 시골길을 달리는 즐거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알 수 없습니다. 달려가고 있지만 모든 게 적요한 침잠에 빠져드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오후 3시쯤의 빈 버스는 녹음이 우거진 인터스텔라를 향해가는 낡은 우주선 같은 느낌마저 듭니다. 라디오 사운드도 경적 소리도 없고, 침묵만 가득합니다.

마을버스는 단순히 사람을 실어 나르는 게 아니라 다양한 서사가 있는 인생을 싣고 달립니다. 한 달에 한 번 읍내로 행차하는 옥순이 할머니가 버스를 탈 때는 3분 쇼가 펼쳐집니다. 정류장을 지나쳐 후진을 해서 할머니를 태우는 일도 종종 일어납니다. 출입문이 열리면 할머니께서는 먼저 지팡이를 탁 버스 안에 올려놓고, 기역자로 구부러진 허리를 바동거리며 온 힘을 다해 간신히 올라탑니다. 누군가 도움을 주려고 하면 완강히 거부합니다. 아직 이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다는 자존감 같은 거겠죠. 그리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선 몸빼 바지 속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냅니다. 하나, 둘, 셋, 꼼꼼히 세기 시작합니다. 다 세었는가 싶었는데 다시 처음부터 셉니다. 그렇게 적어도 세 번쯤 센 뒤에 운전기사 아저씨한테 건네줍니다. 옥순이 할머니가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으면 손님들은 올 게 왔다는 눈빛으로 으레 자동 변환이 됩니다. 그냥 지켜보는 거죠. 조니 뎁과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오래전에 출연했던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거구의 몸집인 엄마가 외출할 때 온 동네 사람들이 구경거리로 삼는 폭력적인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옥순이 할머니는 누구 눈치를 살피지도 않지만 어느 누구도 눈총 주지 않습니다. 그게 그냥 우리 동네 마을버스의 스타일인 겁니다.


<건축학개론에 나온 정류장보다 더 운치가 있는 버스정류장>


입뿐이(이쁜이가 아님) 할머니가 버스를 타면 조금 소란합니다. 입을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연신 중얼거립니다. 봄철에는 농사 참견입니다. 기계가 모를 다 심어주니 그냥 놀고먹는 거여. 저 집은 이제 감자를 심으면 내년 하지 때나 먹겠네. 옥수수에 비료를 주지 않으니 바짝 마를 수밖에. 요즘은 꽃에 대한 품평이 한창입니다. 해바라기는 공갈 꽃이야. 해바라기의 노란 꽃잎은 수정하기 위해 벌을 유혹하려고 핀 것임을 어디서 들었던 모양입니다. 능소화를 보고는 한숨을 내쉽니다. 꽃이 아니라 한이 핀 거여. 한이. 임금을 그리워하던 궁녀 소화가 죽은 뒤 그녀의 무덤에서 피어난 능소화의 전설을 알고 있기에 하는 말이 틀림없습니다. 루드베키아를 보고는 놀립니다. 외눈박이 왕눈이 꽃이네. 접시꽃을 보고는 침을 꿀꺽 삼킵니다. 어이구, 먹을 걸 가득 담았구먼.

치매로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를 일주일에 두 번씩 면회를 가는 민구 할아버지는 요즘 보이지 않습니다. 할머니를 보살피려면 당신 자신이 할머니보다 더 오래 살아야 한다고 했지만 그 바람은 소용없는 게 되고 말았습니다. 할머니보다 먼저 꽃상여를 타고 삼도천을 건넜으니까요.

평생 감자, 고구마, 옥수수, 들깨, 참깨 농사를 지은 춘숙이 할머니의 말도 귓가에 와닿습니다. 작년에 고구마를 삼백 싹 심었는데 멧돼지가 다 파헤쳐 놔서 한 개도 못 건졌어. 농사는 말이야, 하늘이 먹으라고 허락해야 먹는 법이여.

우리 동네 마을버스는 이런저런 어르신들이 평생 땀 흘리며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 진솔하게 쓴 서사시를 싣고 달리는 도서관이며 인생교실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하드보일드 한 스토리와 시골생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