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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Aug 11. 2022

영화 <헤어질 결심>

- 안개로 만들어진 영화 

   

                                          산과 바다, 그리고 안개의 어우러짐 


  사랑은 감정이고, 감정은 비이성적이죠. 그러니까 사랑은 정의도 안 되고, 예측도 할 수 없습니다. 해준(박해일)이 서래(탕웨이)를 만난 것처럼요. 서래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삶의 한 지점과 영원히 결별할 때, 진정으로 사랑하지만 떠나보내야 하는 사랑도 있다는 것에 대해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랑을 사랑으로 기억하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도 없습니다. 전혀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헤어지는 걸 슬퍼하는 미신에 빠져 있는 족속들은 죽었다 깨도 이해 불가능한 일이죠. 그 흔한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자기 파멸의 사랑으로 심장이 오그라지게 만드는 절실한 사랑을 그려내는 역설에 한숨밖에 안 나왔습니다. 결국 <해어질 결심>은 이별이 아닌 영원히 사랑하겠다는 다짐이며, 언제나 진행형인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한다고 했을 때 당신의 사랑은 끝났고, 당신의 사랑이 끝났을 때 나의 사랑은 시작되었다.’는 둔중한 대사가 오래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헤어질 결심>의 뛰어난 미장센은 정훈희 가수가 부르는 ‘안개’입니다. 대체 불가능한 목소리입니다. 단순히 OST가 아니라 비음의 몽환적인 음색과 가사는 유령처럼 스멀스멀 나타납니다. 해준과 서래가 만나고, 빠져들고, 부서지는 건 안갯속에서 이루어집니다. 공기도 아니고 물도 아닌 안개처럼 현실인 듯 꿈인 듯 경계를 넘나드는 자기 파멸의 사랑은 그래서 더 안타깝습니다. 현실로 살아가기에는 제약이 너무 많고, 그냥 꿈으로 여기기에는 입김이 너무 뜨겁습니다. 서래는 현실을 떠나 꿈처럼 사라지고, 해준은 현실에 남겨지지만 꿈속을 헤매겠죠.  



  <헤어질 결심>를 보고 나서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과 기형도 시인의 <안개>가 떠올랐습니다. 현실을 벗어나 안개도시 무진에서 펼쳐지는 권태와 허무의 서사인 <무진기행>과 산업화와 물신주의를 비판한 <안개>. ‘안개’는 단순히 분위기를 조성하는 배경에 머무르는 게 아니라 욕망의 은닉, 혹은 정신적 불안과 모호한 심적 상태를 나타내기도 합니다.         


       


                                                김승옥의 <무진기행>      

  무진에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안개다.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서 밖으로 나오면, 밤 사이에 진주해 온 적군들처럼 안개가 무진을 삥 둘러싸고 있는 것이었다. 무진을 둘러싸고 있던 산들도 안개에 의하여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유배당해 버리고 없었다. 안개는 마치 이승에 한(恨)이 있어서 매일 밤 찾아오는 여귀(女鬼)가 뿜어  내놓은 입김과 같았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에서 방향을 바꾸어 불어오기 전에는 사람들의 힘으로써는 그것을 헤쳐버릴 수가 없었다. 손으로 잡을 수 없으면서도 그것은 뚜렷이 존재했고, 사람들을 둘러쌌고 먼 곳에 있는 것으로부터 사람들을 떼어 놓았다. 안개, 무진의 안개, 무진의 아침에 사람들이 만나는 안개, 사람들로 하여금 해를 바람을 간절히 부르게 하는 무진의 안개, 그것이 무진의 명산물이 아닐 수 있을까!     





                                        기형도의 <안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을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 중략 ………………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람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금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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