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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노란하마 Oct 20. 2022

박노해 시인의 <너의 하늘을 보아>

- 시인이 죽도록 사랑하는 세상을 만나다

  

  시(詩)는 말(言)과 절(寺)이 결합되어 만들어졌습니다. 말의 사원인 셈이죠. 말의 사원에서 수행하는 시인은 묵언으로서 끊임없이 성찰하고, 그로써 언어의 사리를 드러냅니다. 언어의 사리에는 시인의 영혼이 담겨있고, 세상에 대한 사랑의 방식이기도 합니다. 시는 곧 사랑과 같은 색깔이고, 무게 또한 같습니다. 시인은 말이 소설의 언어와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가 거기에 있습니다. 소설은 사회의 반영이고, 사건의 재현입니다. 사전적인 정의에 따른 언어로 인과 논리에 따라 사건을 진행시키면 독자들은 카타르시스를 체감하게 되죠. 인물과 사건을 정확히 전달하려면 소설의 언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이어야 합니다. 사전적인 의미를 뛰어넘는 언어로 소설을 쓰게 되면 초현실주의로 빠지게 되죠. 인간의 내면적인 잠재의식의 미로를 더듬게 되는 겁니다. 사건은 증발하고, 자의식만 남게 되죠. 재미있는 소설을 추구하는 독자들이 읽게 되면 수면 효과는 즉각 나타납니다. 뭐 이따위 소설이 다 있어! 소설을 보다가 집어던지기 일쑤죠.

  하지만 시인의 말은 애초부터 사전적인 정의를 뛰어넘는 언어입니다. 다의적이고, 내포적일 수밖에 없죠. 시인이 쓰는 말은 외연의 포로가 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초월해 시인이 만들어낸 세계로 수렴이 됩니다. 시인의 말은 시인의 세계이고, 존재에 대한 표현입니다. 그러니까 김춘수 시인의 <꽃>은 사전적인 의미의 ‘꽃’(花 flower)을 초월해 오직 시인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인간의 존재’ ‘존재의 의미’ 등으로 창조되는 거죠. 정현종 시인의 <섬>은 일반적인 ‘섬(島 island)’을 초월해 시인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인간이 추구하는 이상 세계’ ‘낙원’ ‘행복’ 등등의 의미로 창조되는 거고요. 그러니까 시는 시인의 성찰과 사유로 빚어낸 언어의 사리가 분명합니다.



  박노해 시인의 <너의 하늘을 보아>를 읽으며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습니다. 군부독재 정권하에서 핏빛 혁명정신으로 치열하게 투쟁했던 <노동의 새벽>의 젊은 열정이 이제는 우주의 섭리를 깨달아 그것을 사랑으로 승화시켜 인간해방을 추구하는 게 아닌가 싶었습니다. 갠지스 강가에서 오랫동안 좌선을 통해 우주의 섭리를 깨달은 도인처럼 박노해 시인은 개인의 성찰과 사유로부터 시작된 시행(詩의 紀行)은 야생초의 씨앗 하나, 삼라만상의 모든 생명체, 그리고 우리 이웃의 작은 몸짓 하나에까지 심화 확대됩니다. 그 모든 것을 연결하고, 꿰뚫는 건 사랑입니다. 자신에 대한 사랑, 인간애와 세상에 대한 사랑의 실천의 메시지가 시에 넘쳐흐릅니다.      


    나는 도시의 세련미를 좋아한다

    그래서 광야와 사막을 좋아한다      


    나는 소소한 일상을 좋아한다

    그래서 거대한 악과 싸워나간다     


    나는 밝은 햇살을 좋아한다

    그래서 어둠에 잠긴 사유를 좋아한다     


    나는 혁명, 혁명을 좋아한다

    그래서 성찰과 성실을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 중에서      


  개인의 일상이 중요하기에 거대한 악과 싸우는 것이며, 햇살의 가치는 어둠을 극복한 뒤에라야 의미가 있고, 진정한 혁명은 자기 성찰이 먼저 선행되어야 진정성이 있게 됩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고, 경제적 본능의 소유자입니다. 욕망과 본능에 충실하면 세상은 만인 대 만인의 전장 터가 되며, 황폐한 사막이 되죠. 오직 동물적인 생존 원칙만 강조하면 모든 인간은 늑대가 됩니다. 사람이 늑대가 아닌 건 함께 사는 공존의 원칙과 인간애가 있기 때문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거대 담론의 사회적 정의만을 외치는 건 정치적 쇼에 가깝습니다. 사회적 정의를 내세우지만 어딘지 모르게 자신의 정치적 잇속을 챙기는 구린 냄새를 풍기죠. 그러니까 인간적으로 신뢰와 믿음이 가는 것은 개인의 깊은 성찰과 고민으로부터 시작해서 공동선으로 다가가려고 노력하는 몸짓입니다. 개인 부재의 집단이나 집단 부재의 개인은 둘 다 불구입니다.        


   우리가 길을 잃은 것은

   길이 사라져 버려서가 아니다

   너무 많은 길이 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앞이 보이지 않는 것은

   어둠이 깊어져서가 아니다

   너무 현란한 빛에 눈멀어서이다


      ………………<중략>………………        

 

  한번 멈춰야 한다

  한번 놓아야 한다    

      

  온 우주에 나는 단 하나뿐이듯

  진정한 나만의 길은 하나뿐이니     


                     '길 잃은 희망' 중에서


  박노해 시인의 <너의 하늘을 보아>를 읽으며 피로써 피를 씻고, 죄로써 지를 씻는 인간의 어리석음을 내리치는 죽비소리를 듣습니다. 사랑으로 세상을 감싸는 그의 따뜻한 손길의 체온이 느껴집니다.  

  야생초 풀씨 하나로부터 모든 각각의 사람, 그리고 우주로까지 확대된 박노해 시인의 시선을 만난 가을날이 행복해졌습니다. 아주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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