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lxible, 유연한
Flexible=flex(구부리다) + ible(할 수 있는) 구부리고 변형할 수 있는, "유연한" 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어.
물건이나 몸뿐 아니라, 사람의 태도, 생각 등 상황에 맞춰 형태나 방식을 바꿀 수 있는 것들을 모두 flexible이라고 불러.
아가가 있는 대부분의 집들이 그러하듯 우리 집에도 놀이매트가 깔려 있어. 네 칸으로 접어지는 두툼한 녀석 하나가 거실을 떡 차지하고 있지. 매트를 깔면 집안 분위기가 확 바뀌어버려서 어른들은 인테리어 파괴라고 불러. 그런데 인테리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어. 네가 하도 겁 없이 일어섰다가 벌러덩 넘어지니 네 머리통이 지키는 게 우선이거든.
하루에 두 번 매트를 걷어. 아침 청소하면서 매트를 걷고 너를 보행기에 태워. 15분에서 20분, 보행기를 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야. 청소가 끝나고 매트를 펴면 자그마한 거실에는 보행기를 탈 공간이 없거든. 소아과 선생님은 되도록 보행기 태우지 말라 했지만, 아직 걷지 못하는 너는 보행기를 타면 날아다니듯 좋아해. 오늘은 한 팔을 뒤로 돌린 포즈로 멋지게 후진도 했어.
저녁 식사 전이나 후에 다시 매트를 걷어. 이번에는 완전히 걷어내는 게 아니라 방향을 돌린 다음 가운데가 세모꼴이 되게 세워. 그러면 작은 터널이 생기는데 그게 우리의 저녁 놀이터야. 터널의 길이는 너무 무섭지도, 너무 싱겁지도 않을 만큼 딱이야. 몇 달 전 처음으로 터널을 만들었을 때 너는 주춤주춤 했는데, 이제는 쌩하고 빠르게 지나가.
오늘은 네가 터널에 좀체 들어오지 않고 밀당을 하네. 엄마가 들어와 보시라 이거지. 나는 마다하지 않고 터널에 들어가. 꽉 껴. 쭉 폈다 웅크렸다 하며 앞으로 너에게 다가가. 흡사 배추흰나비 애벌레처럼. 아침에 청소를 잘했던가. 바닥을 온몸으로 닦는 느낌이야. 그런데 엄마가 가까워질수록 좋다고 너는 소리를 질러.
작은 집에서 아가를 키우니 엄마가 바빠. 그래도 매일 부지런히 매트를 걷고 이리저리 돌리는 건 네가 집의 새로운 면을 마주하길 바라기 때문일 거야. 같은 거실이어도 매트를 어떻게 두느냐에 따라 네가 안전하게 노는 푹신한 배경이 될 수도, 보행기를 쌩쌩 타는 레이싱장이 될 수도, 상상초월 모험을 즐기는 터널이 될 수도 있지. 정말 유연한 녀석이야. 우리 매트.
네 마음에도 매트가 깔려있을 거야. 그걸 그냥 내버려 두지 마. 평상시에는 편안한 상태로 펼쳐놓지만 가끔은 걷어봐. 생각보다 청소할 게 많다. 아무것도 없는 바닥에서 속도를 즐겨. 터널을 만들어서 얼마나 뚫고 나갈 수 있는가 시험해 봐. 매트가 없는 상태의 나는 어떤 사람인지 아는 나만의 시간. 그 안전한 시간으로 인해 조금씩 속도를 내고 터널을 전진할 수 있는 담력을 얻을 테니.
엄마도 그랬거든. 어느 날 마음의 매트를 걷어봤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였지. 처음이었어. 누구에게 보여줄 생각 없이 쓰는 글 속에서 지나간 삶의 먼지가 풀풀 날렸어. 내가 그렇게 유치하고 치사한 줄 처음 알았어. 사소한 것에 삐지고, 남들을 부러워하는 마음이 많다는 것도.
그다음은 속도를 냈어. 네가 보행기를 타듯, 나도 글 위에서 쌩쌩 달렸어. 이루지 못한 것들, 해보고 싶은 것들, 꿈꿀 수 있는 건 다 주워 담았어. 얼마나 빠르게 썼는지. 나만의 바닥에서 안전하게 내는 속도였어.
그런데 숙제가 남았어. 나만을 향한 글을 쓰다 보니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진 거야. 그래서 터널을 만들었어. 매트를 세워 긴 동굴을 통과했어. 내 바닥에서, 글과 함께라서 할 만했어. 결국 뚫고 나와 너에게 닿았잖아.
오늘은 애벌레 역할을 너무 열심히 했나 봐. 허리가 조금 쑤셔. 내일은 매트를 세워서 울타리를 만들어볼까. 매트로 놀기 기네스북이 있으면 나 일등할 자신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