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샤워

Unwound, 풀어내는

by 참읽기
Unwind= un(반대로) + wind(감다, 꼬다, 비틀다) un은 무엇이든 반대로 하는 걸 말하고, wind은 물건을 풀어지지 않게 꼭꼭 감아둔 것을 뜻하지.

이 말에서 나온 Unwound은 거꾸로, 끈을 다 풀고 싸매어진 종이와 보자기를 헝클어서 안에 있는 내용물을 자유롭게 해주는 것을 말해.


네 밤잠을 재우고 나오면 제일 먼저 욕실로 달려가. 집안일들이 산더미 같아도 다 제쳐두고 샤워를 해. 네가 초저녁에는 종종 깨는데, 경험상 가장 안 깨는 시간이 자고 난 직후야. 몸에 물 대기 가장 안전한 시간이지. 예전에는 그걸 모르고 집안일 먼저 하고 샤워하다가 우는 소리를 듣고 머리 거품 가득 묻히고 몸엔 물 뚝뚝 흘리는 채로 뛰어나와 너를 달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야. 네가 밤잠 자다가 깰 때는 아빠로 절대 달래 지지 않고 엄마가 올 때까지 서럽게 우는 이유 뭘까.



도둑밥 먹고 도둑잠 자는 아가 엄마살이답게 씻는 것도 도둑샤워야. 진짜 도둑이라는 건 아니고 도둑이 훔쳐내듯이 순식간에 해낸다는 거야. 어찌나 대강 씻었는지 일전엔 외할머니가 내 귀를 보시더니 귀는 씻는 거냐고, 귀도 비눗칠하라 하셨어. 창피하더라. 그래, 얼마나 빨리 씻었던지 귀까지 씻을 여유가 없었어. 그 말 들은 이후 바빠도 귓바퀴를 돌아가며 비누칠을 해.



그런데 며칠 전부터 샤워를 하면서도 뭔가 개운하지 않았어. 우리 집은 오래된 아파트라 욕실 배수시설이 좋지 않은데 왠지 미꼬리한 냄새가 나는 것 같았지. 때마침 향초를 선물 받아서 욕실에 아무도 없을 때 냄새를 없애고자 한 시간씩 초를 켜 두었어. 늘은 샤워를 하는데 초만 켜고 싶더라.



전등불을 끄고 초에 불을 붙였어. 갑자기 달라졌어.환한 불빛 아래서 보이던 모든 것들이 사라졌어. 청소해야 할 욕실 바닥, 빨래해야 할 수건, 닦아야 할 거울. 해야 할 일들이 어둠 속으로 물러났어.


촛불만 남았을 때, 나는 그냥 '나'였어.


좀 전까지 먼지 날리는 전투지에서 땀 흘리고 있었는데, 순간이동해서 귀한 대접받으며 신비한 약으로 치료받는 기분이었지.


샤워하면서 하루 동안 감기고 또 감겼던 긴장의 끈을 풀어내. 잠에서 깨자마자 정신 못 차린 채로 아침 차리고 청소하고 빨래 돌리느라 씻기는커녕 거울도 못 본 얼굴에 비누칠 하며 한 겹 한 겹, 내 몸을 꽁꽁 동여맸던 피로를 풀어내. 너를 업고 안느라 한껏 올라간 어깨를 감싸. 통증벨트와 하나가 되어 버린 지 오래된 허리를 통통 두드려. 엉덩이 붙이면 네가 울까 봐 종종거린 다리를 주물러.



매일 하는 샤워인데 불을 끈다고 뭐가 이렇게까지 다를까? 나에게는 꼭 필요했던 시간이야. 자신을 돌볼 시간. 몸만큼 마음도 고단했거든. "아가는 어떠니?" 묻는 사람은 많았어. 나도 하루 종일 네게 물었지. "배고파?" "졸려?" "불편해?"


그런데 그 누구도 나에게는 묻지 않았어. "너는 어떠니?" 나조차도 너에게 모든 시간과 관심을 쏟느라 잊었어. 너무 사소해서 차마 아빠에게도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매일 가슴 속에 쌓여갔지.


너를 잘 사랑하려면, 나를 잘 돌보아야 해. 어깨가 아프다고 신호를 보낼 때, '참자'가 아니라 '쉬자'라고 답해줘야 해. 피곤하다고 속삭이는 몸에게 '엄마니까 당연하지'가 아니라 '수고했어'라고 말해줘야 해. 나는 나이기도 하고 "너의 엄마"이기도 하니까 두 배로 소중하게 대해줘야지.


샤워는 도둑처럼 하는 게 아니었어. 내 안에 쌓인 무게를 내려놓는 시간이었어. 꽁꽁 감긴 것을 풀어내듯, 나를 풀어주는 시간. 앞으로 자주 향초만 켜둔 채 샤워를 해야겠어. 그러니 오늘 밤에도 푹 자주렴. 네가 편히 잘 때, 엄마도 나를 편히 대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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