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로

Recall, 내가 무엇 하던 사람인지 기억해내다

by 참읽기
Re(back) + call(kalla; 부르다) 뒤로 가서 다시 불러낸다는 말이야.
기억이 퍼뜩 떠오른 게 아니야. 적극적으로 잃은 것을 찾아가 마음 안쪽으로 되돌리는 걸 말하지.


네 살 수하야,

<구름빵> 공연을 봤어. 대학로야. 혜화동, 이화동, 명륜동, 동양서림, 동성고등학교, 익숙한 지명들. 잠든 너를 업고 마로니에 공원을 지나. 네 손이 자꾸 떨어져. 가방을 잘 못 멨는지 피가 안 통해.



스무 살에 교회 연극부 선배들을 따라 처음 이곳에 왔어. 무슨 공연을 보았는지 기억이 안 나. 신났던 것만 선명해. 그 후 테헤란로나 여의도가 아니라 대학로에 나의 꿈을 두었어. 공연을 볼 때면 재미있지 않았어. ‘내가 저기 있어야 하는데’ 아쉬웠어. 하지만 용기가 없었지. 내가 할 수 있을지, 내가 해도 되는지, 질문만 하다가 대학 졸업 한 달 앞두고 문을 두드렸어. 6시간 대기해 미로 같은 방들을 거쳐서 편입 시험을 봤어. 학교에서 오라고 하더라. 합격증을 프린트하고 코팅했어.



엄마가 물었어. 늦었다. 얼굴이 출중하지 않다. 재능이 탁월하지 않다. 뭐하고 먹고살 거냐. 시집은 어떻게 갈 거냐. 서운하기보다 미안했어. 소극장 감성에 b급 취향을 가진 내가 뭐라 해. 엄마의 희생을 연장하고 싶지 않았어. 보답은 못 해도 그러면 안 될 것 같았어. 학교에서 걸려 온 전화에 ‘못 간다’ 대답했어. 마호가니 색 장롱 앞이었어. 언니의 결혼 준비로 따라간 마석가구단지. 스물다섯이었어. 스스로 포기했으니 누구를 탓할 수 없었어. 꿈을 품었던 걸 기억할 자격도 없는 맹추. 도망 다녔어. 그런 적 없는 듯 살았어.



너의 아빠와 결혼하고 하고 싶은 일을 지지받았어. 꿈을 상기했어. 서른하나, 내가 하는 일에 공연을 더할 수 있는 강좌를 신청했어. ‘재능 있다’라는 생각이 부수어지는 시간이었어. 일찍 도착하면 대기할 장소가 없어서 창고에서 기다렸어. 동물 소리를 연습했어. 옆 사무실 사람이 “어디서 개가 짖나 봐.”라고 했어.



일하던 학교에서 수업을 개설하기로 했어. 두렵다, 걱정된다고 할 때마다 너의 아빠가 용기를 줬어. 꿈같은 일이 일어났어. 아이들과 만나고 공연을 준비했어. 도움의 손길들이 생기고 공연을 올렸어. 소공연장이 없어져서 어쩌나 했더니 더 큰 공연장에 기회가 생겼어. 함께 할 선생님들을 만났어. 매 학기 공연을 올렸지. 깜깜한 밤에 퇴근하는 것도, 토요일마다 간식 사줘가며 연습하는 것도, 방학에 출근하는 것도, 눈 빨개지도록 자료 찾고 음악 작업하는 것도, 공연 물품 옮긴다고 학교에서 공연장으로 열 번을 왔다 갔다 하는 것도 아무렇지 않았어. 꿈속에 살고 있는데.



힘들긴 했나 봐. 연습 후에, 공연 후에 쓰러졌어. 그러다 너를 임신했는데, 11주에 큰 고비가 왔어. 의사 선생님의 ‘선택하셔야 합니다’라는 말에 그길로 일을 그만뒀어. 너를 낳고 나서 내가 뭘 좋아했는지, 뭘 잘했는지 기억 안 났어. 3년 동안 아이를 기르는 일만이 내 일인 줄 알고 살았어. 오늘 대학로에 서자 떠올랐어. 나는 공연을 사랑했지. 연기도 연출도 잘했지. 당장 공연을 가르치러 돌아갈 수 없어. 너를 키우면서 하기엔 엄마 체력이 안 따라줘. 생각했어. 연기하고 공연 만들며 나는 뭘 하고 싶었던 걸까?



『미들 마치』 속 도러시아를 생각해. 캐소본이 세상을 떠나고, 그녀는 결혼을 통해 좌절되었던 삶을 다시 돌보지. 실제로 땅을 돌아보며 설계도를 그리기도 해. 로윅의 새 성직자를 모시기 위해 페어브라더씨의 삶에 관심을 가지는 장면에서 나는 도러시아가 성장했음을 알았어.

“그런데 왜 더 많은 일을 하시지 않았나요?” 이제 도러시아는 원래 품었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전락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미들 마치2』, 조지 앨리엇, 이미애 옮김, 민음사, p114



도러시아는 구덩이 같은 결혼 생활을 지났어. 자기 연민을 갖지 않았지. 자신의 삶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을 때 그녀의 품은 넓어졌어. 원래 품었던 뜻을 이루지 못한 다른 사람들의 삶에 공감했어. 그들이 자기 뜻대로 삶을 꾸려나갈 수 있게 도왔지. 페어브라더씨는 그녀로 인해 교구 목사직에 성실하게 일할 수 있었어. 휘스트 게임으로 푼돈을 벌지 않아도 되었지.



도러시아는 지나온 아픔을 자신의 지경을 넓히는 힘으로 삼았어. 그녀처럼 해보고 싶어. 나도 내가 좌절했던 경험을 다른 사람들이 걸어갈 길로 만들고 싶어. 꿈을 상실해봤던 사람들에게 닿도록. 나는 이야기를 전하고 싶다는 걸 알았어. 이전엔 내가 직접 연기했고, 다음엔 아이들과 함께 공연을 만들었어. 다른 방식도 괜찮겠지. 나를 닮은 이야기를 지어보려고 해. 뭘 좋아하는지, 뭘 할 수 있는지를 잃어봤던 나의 경험을 말하고 싶어.

들어봐. 그릇 인간의 이야기야. 도시에서 사건이 생겨서 한 사람 이 그릇을 만든 분에게 가는 거야. 한 아이가 가게 돼. 그 애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담을 수 있는지 몰라. 긴 모험을 통해 자신을 알게 되고 무엇을 담을지 정해.



네가 열 한 살쯤 엄마가 글을 완성할 거야. 네가 읽을 수 있게 할게. 글은 네 마음에 가닿겠지. 주인공과 함께 자신을 찾겠지. 이야기는 공연이 될 거야. 공연장에서 펼쳐질 걸 생각하고 그려냈으니까. 이야기는 자기가 뭘 좋아하는지, 뭘 잘할 수 있는지 알고 싶은 사람들에게 동반자가 될 거야.



널 많이 키우고 나면 R이모에게 전화할 거야. 준비되었다고. 기본기부터 다져야겠지만 성실하겠다고 약속할 거야. 이모에게 배우고 나면 작은 극단에 들어가겠지. 꿈을 다시 찾는 이야기면 좋겠어. 나는 작은 배역도 충실할 거야. 이름도 빛도 관심 없어.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할 거야. 이제 어떻게 시집갈 건지 걱정할 필요 없지. 다른 걱정도 안 할 거야. 내 무대를 지킬 거야.



수하야, 엄마는 결혼에 어울리는 여성이 되어야 하는 줄 알았어. 내 꿈은 결혼에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어. 가장 나다운 일이었지만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했지. 착각이었어. 결혼하고나서 너의 아빠가 나를 이해해줬어. ‘결혼에 준비되어야 한다’라는 강박에서 벗어났고, 내 꿈을 지지해주는 사람으로 인해 다시 시작할 수 있었어.

사회에서 말하는 결혼에 어울리는 여성이라는 건 환상이야. 너의 꿈대로 살아도 결혼을 잘 준비할 수 있어. 사랑하고, 이해하고, 책임질 줄 알고, 상대방의 꿈을 지지할 수 있다면. 나는 네가 사회가 그려놓은 결혼에 어울리기 위해 미리 겁내고 너의 무대를 내려놓지 않았으면 해. 너를 선명하게 만들고 책임을 다할 준비를 하면서 너 같은 사람을 알아보길 바라.



떨어진 네 손을 어깨에 단단히 올려. 가방이 슬쩍 움직이면서 팔에 피가 돌아. 살 것 같아. 허리는 못 펴지만 꿋꿋하게 걸어. 나의 꿈이 구름빵처럼 하나, 둘 떠올라. 대학로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꼬리가 올라가. 기억이 지나가고, 기대가 다가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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