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풍 위로 첫눈이 내려앉았다는 소식을 들었다. 눈은 내가 겨울을 사랑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다. 어떤 말이든 앞에 처음이 붙으면 들뜨지만 첫눈을 생각하면 유독 마음이 맑게 일렁인다.
눈이 내린 동네를 걷기 위해 서둘러 집을 나서던 어느 겨울 아침을 기억한다. 하얀 강아지는 흰 눈 위에 발자국을 남겼고 나는 눈처럼 고요하게 왔다 간 어느 시절의 마음을 그렸다. 때가 되면 스르르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마음이 꼭 눈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조금 씁쓸하지만 이 또한 내가 눈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때를 놓친 마음들이 마음껏 쌓이다 아무도 모르게 사라졌으면 했다. 그 어떤 것도 끝내 붙잡지 않는 무심함으로, 최대한 홀가분하게.
나보다 어른 한걸음만큼 앞서 있는 하얀 강아지의 꼬리가 한껏 올라간 것을 보니 젖은 양말이 가볍게 느껴졌다. 설익은 아침 햇살과 흰 눈은 고요한 동네를 환하게 비추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색을 섞으면 검정이 되지만, 모든 빛을 섞으면 흰색이 된다고 한다. 하얗게 센 엄마의 머리카락과 희뿌연 개의 눈동자를 보면, 흰 것은 색이 빠져서 텅 빈 게 아니라 빛의 마지막 얼굴이라 믿고 싶어진다. 사계절의 끝에서 눈으로 세상을 비춰주는 겨울은 꼭 빛의 세계 같다. 물감처럼 마구 뒤섞여 탁해진 마음을 정화해 주는 겨울을 나는 아마 영원히 사랑할 것이다.
머지않아 창밖으로 나를 이끄는 눈 속을 오래 걷게 될 날을 기다린다. 옆에는 걸음이 느려진 하얀 강아지가 있고, 창백한 세상을 도화지 삼아 무엇이든 그려볼 용기가 생길 빛의 세계에서의 날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