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베푸는 친절의 힘
그냥 행하는 친절함보다 강한 건 없다.
보건교사 안은영은 악함이 사라질 기미도 보이지 않는 세상에 ‘그냥’ 친절함이라는 출사표를 던졌다. 그렇게 안은영의 친절함은 조금씩 조금씩 세상을 바꿨다. 물론 그 세상이 안은영이 존재하는 물리적 위치에 한정되어 있긴 했지만, 안은영이 한 곳에만 칩거하는 사람은 아니니 세상을 바꿨다고 말해도 틀린 건 없다. 더하여 안은영의 이해(利害)를 따지지 않는 친절함에 도움을 받은 누군가가 또 다른 친절함을 베풀어 자신의 세상을 바꿔간다면 우리의 세상은 친절함이 악의를 이기는 세상이 될 수 있지 않을까?
매일 부정적인 이야기가 뉴스 포털을 가득 채우는 일상이 익숙해져 있는 내게 보건교사 안은영은 그래도 우리의 친절함을 잃어선 안된다고 얘기해주는 듯 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며 마냥 기분이 좋아져 해사하게 미소를 짓기도 했지만, 어딘가 모르게 마음 한 켠이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아직 세상에 남아있는 따뜻한 온기마저 외면한 채 그저 세상은 원래 이런거야 라며 차가운 시선을 보내던 내게, 안은영은 얼음을 녹이는 햇살과 같았다.
정세랑 작가의 이 발칙한 이야기에 또 한 번 난 행복해졌다.
“우리의 친절이 오염된 세계에 단호히 맞설 거예요!”
- 정세랑
p. 58
저녁을 먹으러 가는 길엔 야경이 소원처럼, 사랑처럼, 약속처럼 빛났다. 언젠가는 소원을 훔치는 쪽이 아니라 비는 쪽이 되고 싶다고, 은영이 차창에 이마를 대고 밖을 내다보며 생각했다.
p. 110
유정은 자주 스스로를 누군가 버리는 걸 까먹은 채 구겨 놓은 영수증 같은 존재라고 여겼는데 한 번이라도 그렇게 구기말 없이 웃어 보고 싶었다.
p. 123
은영은 다른 종류의 보상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가, 어느새부터인가는 보상을 바라는 마음도 버렸다.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고 해서 자신의 친절함을 버리고 싶진 않았기 때문이다. 은영의 일은 은영이 세상에게 보이는 친절에 가까웠다. 친절이 지나치게 저평가된 덕목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은영과 인표는 통하는 구석이 있었다.
p. 191
어린 은영은 살아간다는 것이 결국 지독하게 폭력적인 세계와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피할 수 없이 다치는 일이란 걸 천천히 깨닫고 있었다.
p. 222
되면 되지, 이제부터 하면 되지 하고 응원받았지만 마음이 조급해졌다. 살아간다는 거 마음이 조급해지는 거구나. 욕심이 나는 거구나. 얼떨떨한 상태에서 오래된 옴잡이의 마음이 점점 어려졌다.
p. 278
서로의 흉터에 입을 맞추고 사는 삶은 삶의 다른 나쁜 조건들을 잊게 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