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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Nov 23. 2022

로르 아들레르 지음. 《노년 끌어안기》

‘삶의 황혼을 거니는 사람의 고백과 통찰’

이 책의 부제목은 ‘삶의 황혼을 거니는 사람의 고백과 통찰’이다.     


프랑수아 모리아크는 우리가 먹는 배처럼 늙어간다고 말했다. 군데군데 물렁해지고, 군데군데 딱딱해진다는 것이다. 이 책의 번역자는 “늙는다는 건 분명 무언가를 자꾸만 잃어가는 일이다. 머리카락을 잃고, 치아를 잃고, 기억을 잃고, 청각을 잃고, 말을 잃고, 가까운 누군가를 잃으면 우리는 늙어간다.”라고 말한다.     


나는 몇 살인가? 국가가 인정하는 노인 65세가 지난 지 몇 년이 됐다. 노년이다. 마음 한쪽에서 이런 생각을 거부할지라도, 나이는 상당하지만, 나는 희망컨대, 아직 확실히 늙지는 않았다고 알고 있다. 일종의 감압실 안에 있는 셈이다. 나이의 영향은 아직 느껴지지 않는다. 살면서 생긴 육체적, 정신적 몇몇 흉터들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테지만, 나는 모든 걸 너무 빨리 너무 일찍 해버렸다.     


우리는 자신이 늙는 걸 느끼지 못한다. 노화는 삶의 증대일까, 감소일까? 경험의 퇴적일까? 우리의 활력에 연이어 가해지는 충격일까? 우리는 몇 살에 노화가 시작되는지 여전히 알지 못하며, 아마 끝내 알지 못할 것이다. 예전에 나이 든 어른들이 했던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을 실감한다.      


별 특징 없는 늙은 남자보다 나쁜 건 늙은 여자다. 늙은 여자보다 나쁜 건 가난한 늙은 남자다. 가난한 늙은 남자보다 나쁜 건 가난한 늙은 여자다. 오늘날 가장 취약하고 가장 위험에 노출된 계층이 이런 여성들이다. 며칠 전 뉴스를 장식했던 세 모녀 죽음이 단적으로 반증한다. 이들은 구호단체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적절한 조건에서 생활하지 못한다. 법의 사각지대에 놓인 주체들이 되었다.     


나이 감각

나이는 감각이지 실재가 아니다. 그 감각은 어느 날 잠에서 깨어날 때, 혹은 까닭 모를 피로가 덮쳐올 때 혹은 어느 길모퉁이를 돌아서다가 무심코 본, 진열창에 비친 당신의 모습이 당신이 상상한 것보다 훨씬 구부정할 때 덮쳐올 수 있다. 늙는다는 건 옅은 안개가 현실을 살짝 가리듯 모든 걸 조금 흐릿하게 보기를 받아들이는 일이 아닐까?     


우리는 자신이 늙었다는 사실을 알아도 그렇게 느끼지는 못한다. 어쨌든 항상 느끼지 못한다. 젊었을 적엔 스스로 늙었다고 느낄 때도 있었다. 늙어서 가끔은 스스로 젊다고, 아주 젊다고 느끼기도 한다. 이런 의미에서 나이 감각이라고 부르는 것이 존재한다. “마흔 살은 청춘의 노년이지만, 쉰 살은 노년의 청춘기다.”-빅토르 위고.     


요즘 고령이라는 말은 점점 덜 쓰고 인생 제3기, 제4기 같은 말을 쓴다. 곧 다른 나이처럼 흔한 나이가 될 100세를 가리키는 인생 제5기라는 말도 쓰게 될 것이다. 언어도 달라졌고 표현도 ‘완화’되어서 이제는 노인 대신 시니어라는 말을 쓰며, 점점 더 원기 왕성해지고 재정 능력도 갖추고 수도 늘어나서 나이 피라미드를 거꾸로 뒤집을 것 같은 노년층을 가리키기 위해 실버 영역, 실버 경제, 실버 라이프를 이야기한다. 청년은 미래를 구현하고 노인은 현존하는 과거를 구현한다.


우리 세대는 계승사회에서 소비사회로 왔다. 우리가 지식이라고 부르는 것은 오늘날에 거의 의미가 없어졌다. 노인들은 젊은 세대들에게 전해줄 게 아무것도 없는 존재처럼 취급된다. 살이 찌듯이 나이도 찐다. 그것은 감지할 수 없을 만큼 서서히 벌어지는 일이다. 시간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 흐른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시간이 불변한다고 느낀다.     


나이 경험

우리 자신이 한 부분에 대한 비자발적 상실에서 성性은 아주 큰 역할을 한다. 쿳시의 소설 『슬로우 맨』에서 남성성의 상실을 다룬다. 젊은 은퇴자인 폴은 매일 아침 자전거로 산책을 한다. 어느 날 사고가 난다. 그는 스스로 모든 점에서 젊고 아주 건강하다고 여겨왔는데, 병원에서 깨어나면서 갑자기 사람들이 그를 노인으로 취급하는 걸 본다. 제 나이의 진실을, 제 나이를 갑작스레 경험하고 과거에 인간이었던 그는 이제 한낱 기억에 불과하다.     


삶은 경험의 퇴적이 아니라 세월의 축적이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이, 우리는 자기 자신이 그렇게 늙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부모의 죽음은 이제 우리가 ‘맨 앞줄에’ 섰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이다. 우리는 자기 나이에 절대로 익숙해지지 않는다. 외부의 사건들이 우리에게 그 나이를 받아들이도록 강요할 뿐이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 ‘흔적’     


나이 관념

우리는 자신이 늙는 걸 보지 못한다. 그것은 사고처럼 별안간 닥친다. 내 앞에 보이는 모습이 잔인하게도 나 자신일 때 우리는 생각한다. 이 얼굴로 타인들 틈에 온종일 어떻게 돌아다니지? 어떻게 해야 이렇게 구겨진 얼굴로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을까?


등 뒤에서 보면 아직 나는 노인으로 보이지 않는다. 아직은 착각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눈앞에서는 어떨까? 언제까지 나는 나를 받아들일까? 언제까지 나를 ‘알아볼까?’ 우리가 알고 싶어 하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예전에 한계 없이 누렸던 시간은 가혹하게 줄어들었고, 우리는 그걸 제대로 사용하지 못할까 겁낸다. 우리는 제 삶을 훔치고도 무얼 잃는지 깨닫지 못한다.     


패이딩fading이라는 말은 롤랑 바르트가 쓴 말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반발 없이 모든 접촉에서 물러나는 순간을 가리키는 말이다. 호스팅hesting은 자기 나이에도 불구하고 아직 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다. 그들은 스스로 이야기들을 지어내고, 매끈한 피부, 흠결 없는 몸, 도톰한 입술, 결 좋은 머리카락, 언제나 우아한 걸음걸이를 간직한다.     

“우리는 나이가 들어서야 아름다움이 귀하다는 걸 깨닫고, 한 송이 꽃이 폐허와 대포 틈에서 피어나는 일이, 신문과 주식 상장표 틈에서 문학 작품들이 살아남는 일이 기적임을 알게 된다.”-헤르만 헤세, 『노년 예찬』     


자기 부모를 집에 모시지 못했다는 데 죄책감을 느낀다. 부모를 유기했으며, 부모가 비록 보호는 받을지라도 부양받는다는 느낌은 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지독한 슬픔이 옥죈다. 전 재산을 팔아서 들어간 요양원에 들어선 순간 자포자기하고 서서히 소진하고, 사는 기쁨을 잃고, 힘마저 잃어간다. 기다린다. 무엇을 기다릴까? 죽음이다. 최선은 자다가 죽는 것이다. 사람이 모든 걸 놓아버리고 포기하는 순간인 임계점 이후 그저 지속하는, 계속해서 살아가는 기계적인 행위만 남는다. 언젠가 나도 내 노화에 자포자기할까?     


노인차별주의라는 말은 1969년 사전에 등재되었다. 인종차별주의처럼 나이라는 유일한 준거에 토대를 둔 차별과 배척 현상을 가리키며, 오직 나이를 기준으로 개인들에게 사회적 역할을 할당하는 개념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우리 사고방식에 스며들어 변화하고 보편화되어 우리 사회의 작동을 정면으로 공격한다. 노인들에게서 책임을 박탈하고 그들이 ‘부양’받도록 내몬다.      


예전에 남성 인구는 ‘연령대’로 구분되었다. 전쟁 때는 전선으로 떠날 ‘적령기’의 사람들과 너무 늙어서 남아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오늘날엔 나이라는 말 자체가 하나의 지위나 직무보다는 사회적 외관을 가리키는 잡동사니 말이 되었다.     


늙으면 어린아이가 된다고 말한다. 삶의 순환 주기가 거꾸로 작동하는 듯이 이 잘못된 생각으로 우리는 케케묵은 두려움을 가라앉히고 노인도 한때는 젊었으며, 내면에 젊음의 광채와 힘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는걸, 알려고 들지 않는다. 그 때문에 노화를 부동성으로, 고정과 불변으로, 이미 유통기한이 지나서 곧 우리의 지평에서 사라질 것으로 생각한다. 20세기 후반부터 작동해온 계승의 상실이라는 개념은 노년층이 무용하다는 인식을 키웠다.     


죽음도 나날이 더 빨라진다. 애도도, 영구차도, 장례 행렬도, 상복도 없어지고, 화장도 최소한으로 축소되고, 장례식 이후의 대화 시간도 없어지고, 추억의 정원으로 향하는 급행열차만 있다. 선량한 고인이 되려면 입이 무거워야 하고, 아무도 방해하지 않고 매우 신중하게 떠나야 한다. 이를테면 자다가 죽여야 한다. 옛날에는 그것이 가장 두려운 방식이었는데, 오늘날엔 ‘가장 행복한 죽음’이다. 죽음 앞에 우리는 모두 평등하다고 말하는데 그건 사실이 아니다.     


동물은 죽음이 가까우면 서로 결속한다. 그러나 인간은 아니다. 코끼리들은 죽음이 다가오는 걸 느끼고 먼저 간 연장자들이 죽은 장소를 찾아간다. 돌고래들이 친구의 죽음을 겪고 난 뒤 밥 먹기를 거부한다. 기러기들은 동료가 죽으면 비명을 내지르고 방향감각을 잃고 더 날지 못한다. 암컷 침팬지들이 새끼가 죽고 난 뒤에도 죽은 새끼들을 안고 몇 주 동안 내려놓지 않는다. 동물들도 죽음과 애도와 대단히 의미심장한 관계를 갖는다.     

인간과 죽음은 결코 만나지 못한다. 인간이 살았을 때는 죽음이 여기 없고 죽음이 닥치면 인간이 없다.-에피쿠로스.


우리는 모두 언젠가 늙는다. 젊었을 때는 결코 상상하지 못했다. 오늘날 노인은 옛날의 노인보다 덜 노인이다. 점점 더 안 늙을 것이다.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사회는 성장의 결실을 모든 연령층에 공평하게 나눌 준비가 되어 있을까? 아닌 것 같다.

※보부아르 지음, 『노년』 “우리 삶의 의미는 우리를 기다리는 미래에 달린 문제다. 우리는 우리가 누구인지 알지 못하며 앞으로 어떤 사람이 될지 알지 못한다. 저 늙은 남자, 저 늙은 여자, 그들에게서 우리를 알아보자. 우리의 인간 조건을 고스란히 받아들이길 원한다면 그래야 한다.”     


푸코는 1976년에 생명의 연장이 ‘생체 정치’를 조장하리라는 사실에 주목했다. “권력은 삶을 과대평가하고, 부침을, 결핍을, 삶의 끝으로서 죽음이 가하는 타격을 통제하려고 개입한다. …권력이 좌지우지하는 건 죽음이 아니라 사망률이다.”     


내 삶에서 오랫동안 나이 든 사람은 타인들이었다. 오늘날 나는 그 타인들의 일원이 되었다.      


책 소개


노년 끌어안기. 로르 아들레르 지음. 백선희 옮김. 2022.02.25. 마음산책. 236쪽. 14,500원.


로르 아들레르 Laure Adler. 작가, 저널리스트. 라디오 및 텔레비전 방송 프로듀서 겸 진행자. 1950년 프랑스 캉에서 태어났다. 소르본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역사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2015년 레지옹도뇌르훈장을 받았다.     


백선희. 프랑스어 전문 번역가. 덕성여자대학교 불어불문학과 졸업. 프랑스 그르노블 제3대학에서 문학 석사와 박사 과정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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