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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Dec 14. 2022

지그문트 바우만 지음. 『액체근대』

   

다른 책을 읽으면서 ‘지그문트 바우만’이라는 이름을 알게 되어 호기심을 가졌다. 그래서 바우만의 저서 ‘우리는 왜 불평등을 감수하는가’를 읽었다. 그리고 이 책도 읽었다.     


책머리에 ‘유동성fluidity’은 액체와 기체의 특성이다. 이 둘이 고체와 다른 점은, 

권위 있는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 따르면, “접선력이나 전단력을 견뎌내지 못하며” 따라서 “그러한 힘이 가해지면 끊임없이 형태상의 변화”를 겪는다.      


전단력이 가해지면 다른 부분에 대한 한 부분의 위치에 계속적이고 회복할 수 없는 변화가 일어나는데, 이 변화가 바로 유체의 고유한 특성인 흐름을 형성하게 된다. 이와는 반대로 고체는, 전단력이 가해지면 비틀리고 구부러진 채로 상태를 유지하게 되는데, 그리하여 고체는 흐름을 형성하지 않고 본래의 형태로 되돌리는 것이 가능해진다. 고체와 달리 유체는 그 형태를 쉽게 유지할 수 없다.      


유체는 공간을 붙들거나 시간을 묶어두지 않는다. 유체는 일정한 형태를 오래 유지하는 일이 없이 지속적으로 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 따라서 액체는 자신이 어쩌다 차지하게 된 공간보다 시간의 흐름이 중요하다. 

액체는 공간을 차지하긴 하되 오직 ‘한순간’ 채운 것일 뿐이다. 고체는 시간을 무효화하지만, 액체는 대부분의 경우 시간이 가장 중요하다. 라고 긴 설명을 하고 있다.      


바우만은 근대 역사에서 새로운 단계인 오늘날의 속성을 파악할 때 ‘유동성’이나 ‘액체성’이 적합한 은유라고 말한다. 이에 관한 근거로 “토크빌의 『구체제와 프랑스혁명』에서 ‘발견된 고체적인 것들’이 이미 녹슬고 물러터지고 틈새가 벌어져서 도저히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이유로 거부감의 대상이 되고 비난받고 액화가 필요하다.” 를 인용한다. 미국의 포드 자동차를 고체시대의 상징으로 본다.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를 액체시대라고 규정한다.     


심각하게 논거를 들지 않아도 중세 유럽의 농경시대에서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자본과 노동, 시장이 형성되는 과정에서 견고한 성벽은 무력해지고 토지는 농노들이 경작하는 농토에서 공장을 짓는 용도로 변경되었다. 영주와 세력가는 자본가로 바뀌었고 그 자본에 의해 포드의 자동차처럼 분업화하였다. 거대자본과 분업화된 사회에서 노동자는 사회라는 조직의 부속품으로 존재했다. 포드주의는 근대 사회가 ‘무겁고’ ‘부피가 크고’ ‘고정불변’이며 ‘뿌리박힌’ ‘고체’ 단계임을 충분히 의식하고 있었다. 역사와 자본, 경영과 노동이 전부 연결되어 있는 단계에서는 좋든 싫든 이 모두는 오랫동안 서로 고정된 상태일 수밖에 없다.     


근대의 무거운 단계에서 자본은 자신이 고용한 노동자들만큼 견고하게 바닥에 고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은 여행 가방에 서류케이스, 휴대폰, 노트북만 담고 가볍게 이동한다. 거의 어디에서든 잠깐 머물 수 있고 원하면 아무 때나 훌쩍 떠나면 된다. 반면 노동은 과거에도 그러했듯이 오늘날에도 움직일 수가 없다. 오늘날 노동은 ‘임시직’ ‘비정규직’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소프트웨어 시대의 탈-육화된 노동은 더 이상 자본을 지상에 묶어두지 않는다. 노동은 자본이 영토를 벗어나 일시적이며 끊임없이 변화하도록 놓아둔다. 노동의 분리는 무게 없는 자본을 예언하고 있다.      

이들의 상호의존성은 일방적으로 깨졌다. 노동은 예전과 마찬가지로 홀로일 경우에는 불완전하고 충족되지 않으면 그것이 충족되기 위해서는 자본의 존재를 반드시 필요로 하지만, 이제 그 역은 성립되지 않는다. 


자본은 잠깐 동안의 수지맞는 모험을 쫓아 자본이 부족하거나 자본을 공유할 사업동반자가 부족할 리는 없다는 확신에 차서 희망찬 여행을 다니고 있다. 자본은 신속히, 가볍게 여행할 수 있고 그 가벼움과 유동성은 다른 모든 것들 입장에서는 영구적 불확실성의 근거가 되어버렸다. 이것이 오늘날 지배의 기초이고 사회 불안의 주요 요인이다.     


오늘날의 기업 조직들은 의도적으로 내부에 조직 와해의 요소를 심어두고 있다. 고체적 성격이 덜할수록 유동적이 될수록 좋다. 이 세상 다른 모든 것들과 마찬가지로 모든 지식은 빠르게 노쇠할 수밖에 없으며 ‘제도화된 지식을 수용하기를 거부하는 일’ 역시 그러하다. 이제는 선례를 따르거나 축적되어온 경험에 담긴 지혜를 배우는 일을 거부하는 것이 효율성과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교훈으로 간주된다.     


이 책을 옮긴이는 

“바우만은 개인의 해방과 자아실현, 시공간의 문제, 일과 공동체라는 삶의 거의 모든 영역이 ‘액체화’되었다.”라고 전한다. 현재 지구촌 사회들이 근대의 이상은 포기하지 않았으되, 계속 그 완성을 유예시키는 액화된 근대의 힘에 의해 작동되고 있다. 유예과정 속에서 개인의 종착지에 대한 확신 없이 끊임없이 달려야 하는 주자와도 같다. 과거 계몽적 이상 실현을 위한 투쟁의 역사에서 획득했던 확고한 자아정체성과 삶의 방향성을 잃은 현대인은 그 빈자리에 소비와 갈망이라는 두 축을 세워놓고 유예 당한 자신의 정체성을 완성하려고 질주하지만, 쳇바퀴를 도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개인의 노력 여하에 따라서 무엇이든 될 수 있다는 사회적 분위기는 개인의 무한자유와 성취를 보장하는 듯하지만,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개인의 성공과 실패가 온전히 사적 영역 속에 봉쇄된 채 사회와 유기적으로 소통할 수 없는 고독한 과제가 되고 있을 뿐이다.     


액체시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대한민국의 베이비부머 시대는 유교적 부모와 MZ세대 자식들 사이에 끼어 계속 배우고 개척해야만 했다. 부모 세대로부터 배운 것은 삼강오륜을 기본으로 예의를 지켜야 인간이다. 사람이라면 마땅히 ‘인의예지仁義禮智’ 사 가지를 가져야 한다.라고 강요받았다. 인구폭발로 가는 곳마다 치열한 경쟁과 1등만 살아남고 2등은 잊혀졌다. 중동으로, 외항선 선원으로 외화벌이를 나가고 아득바득 살았지만, 컴퓨터, 스마트폰 계속 쏟아지는 새로운 문물을 배우지 않으면, 종업원은 없고 키오스크만 있는 식당에서 점심 한 끼 조차 사 먹을 수 없는 세상이 됐다. ‘액체’보다 ‘고체’가 좋다. 그러나 이제 되돌릴 수 없다. 형편대로 변하는 수 밖에…     


책 소개     

액체근대. 지그문트 바우만 저, 이일수 옮김. 2009.06.01. ㈜도서출판 강. 347쪽. 20,000원.


지그문트 바우만(1925.11.19.~2017.01.09.) 폴란드 출신의 저명한 사회학자. 1971년 영국으로 망명, 리즈 대학교 사회학 교수. 저서 『액체 근대』 등 현대사회의 액체적 성격과 인간 조건을 해명하는 ‘액체 근대 시리즈’를 차례로 발표하며 오늘의 세계에 대한 긴요하고 실천적인 통찰을 선보이고 있다.     


이일수. 서울대학교 영어영문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용인대학교 영어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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