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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서조 Feb 26. 2023

페르난도 사바테르 지음 『이야기 철학』

소크라테스에서  안나 아렌트 까지, 철학과 만남

내 삶의 질문들

궁금증을 해결하고 원하는 것을 얻으려면 질문을 해야 한다. 다시 말해 우리가 질문을 하는 이유는 보다 잘 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다.


소크라테스, “깊이 생각하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는 삶은 살 가치가 없다.”

삶의 가장 큰 과제는 그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또 우리의 삶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묻는 것이다.


조직적인 사회에는 법, 관습 등이 있어서 사람들의 행동을 지도하는 잣대가 된다.

그렇다면 자연은 살아 있는 생물들 각자에게 이로운 것 혹은 해로운 것을 어떻게 알려줄까?

자연에는 매우 효율적인 두 가지 장치가 있다. 바로 기쁨과 고통이다.

예를 들어 배고픔은 고통의 한 형태로 우리가 먹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마찬가지로 갈증은 물을 마셔야 할 필요성을 알려준다.

추위나 더위를 느끼게 함으로써 쾌적한 은신처를 찾게 만든다.

이와는 반대로 적당하게 먹거나 마셨을 때 그리고 적당한 온도에 있을 때 우리는 즐거운 느낌을 갖게 된다.     

삶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그래서 마지막 순간까지 잘 살아야 한다.-에피쿠로스,

살아있는 동안 죽음은 없다. 그리고 죽음이 도달하면 이미 우리는 죽음을 괴로워하지 않는다.

우리가 그토록 두려워한 만남은 불가능하다.

이런 근거 없는 두려움 외에도 우리 인간은 끝없는 불만 속에 삶을 고통스러워한다.

우리는 기쁨을 누릴 수가 없다.

기쁨이란 인간적으로 바르게 살아가는 법을 아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진정한 보상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은 우리를 압도하는 열정, 즉 자연스럽고 단순한 욕구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욕구,

다른 사람보다 더 우위에 서서 그들을 압도하려는 갈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이토록 삶은 터무니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런 철학자들은 절제와 자제를 강조하고 위험한 사회적 욕구에 물들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 이 욕구란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구와 타인을 지배하려는 욕구를 의미한다.


보다 안전한 방법은 시민들이 군주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이다.

두려움을 주는 유능한 군주는 선량하고 바보 같은 군주 보다 시민들의 자유를 훨씬 더 많이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이런 지침서 덕분에 마키아벨리는 나중에 소위 ‘국가이성’의 아버지가 되었다.

국가이성이란 사회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군주들이 저지르는 바람직하지 못한 행동에 대한 변명이다.


갈릴레이는 수학은 경험이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을 분명하게 표현하기 위한 공식이며 경험과 근대 과학이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 그토록 많은 발전이 이루어진 것은 모두가 과학 덕분이다.      

데카르트의 주된 관심은 지식에 확신을 갖는 일이었다.

어떻게 하면 수학에서 느낄 수 있는 확신을 다른 모든 지식에서도 얻을 수 있을까?

그는 일인칭 서술 방식을 토대로 그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이것이 그의 독창성이다.

예컨대 모두에게 어떤 규범을 선언하기 전에 먼저 자신이 지적인 모험을 일인칭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생각하는 것을 의심하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한다는 사실만큼은 도저히 의심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내가 의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한다면 그것은 내가 존재한다는 증거다.

즉 나는 생각하고 의심하는 존재다.


토머스 홉스에게 매력적인 정치 제도는 두 가지 원칙으로 추론할 수 있는데,

이 원칙은 인간의 조건을 정의하고 있다.

첫 번째 원칙은 각 개인은 그 누구와도 나누지 않고 부를 즐기고자 하는 강한 욕구가 있다는 것이다.

두 번째 원칙은 각 개인은 이성을 가지고 태어났으며, 그러기 때문에 모든 수단을 동원하여 악 중의 악인 죽음을 피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원칙 가운데

첫 번째 원칙으로 인해 우리 인간은 이기적이며 또 이웃을 속이려는 성향이 있다. 그런데

두 번째 원칙 덕분에 그런 행동이 매우 위험하며 모든 사람이 모두에게 가하는 폭력이 일반화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다.


스피노자, 만약 내가 바다에서 수영을 하던 중 거대한 백상어를 만난다면 몹시 나쁜 동물이라고 할 것이다. 사실 절대로 유쾌한 일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상어에게는 내가 대단히 좋은 대상일 것이다.

먹이가 되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상어 역시 신의 일부이고 나보다 더 좋지도 더 나쁘지도 않다.

따라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절대적인 의미에서가 아니라 내게 적합한 것을 언급할 때만 의미가 있는 평가다. 인간은 열정의 지배를 받는다. 즉 우주의 영향력으로 일어나는 일의 지배를 받는다.

가령 나는 좋게 보이는 것은 사랑하지만 나쁘게 보이는 것은 미워한다.


라이프니츠, 역시 세상의 질서를 믿었다.

하지만 그의 질서는 스피노자의 이론처럼 기하학적이고 필연적인 질서가 아니라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질서였다. 물론 겉에서 보면 혼란스럽고 불합리하지만, 우주의 모든 것은 한 가지 목적에 부응한다고 믿었다.

예컨대 마구 흩어져 있는 수많은 점을 연결하여 선을 그리다 보면 얼굴 등의 이미지가 구체화 되는 게임과 비슷하다. 하느님은 그 질서의 비밀스럽고 자발적인 설계자다. 우리는 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간혹 있다. 하느님은 완벽하게 자유롭기 때문에 욕구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가능성만 존재할 뿐이다.

하느님은 창조 의지를 가지고 가능성 중에서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하느님이 만든 우주의 계획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최선의 계획이다. 하느님이 선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인간은 전체 중에서 지극히 작은 부분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최선의 계획처럼 보이지 않는 것이다.

전체를 볼 줄 아는 사람에게는 이 세상은 이상적인 곳이다.     

라이프니츠의 우주에는 그 어느 것도 기계적으로 일률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없다.

동일한 두 존재도 없다. 만약 두 개가 정확하게 똑같다면 그것은 이미 하나이기 때문이다.

모든 현실은 ‘모나드’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모나드란 일종의 단순한 영혼의 원자다.

따라서 ‘연장’도 없고 그래서 더 이상 나눌 수도 없다. 모든 모나드는 서로 다르며 하느님이 직접 창조했다. 따라서 이 모나드를 파괴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모나드는 작고 복잡하며 스스로 닫혀 있는 세계와 같다. 즉 창문이 없다. 다시 말해 서로 소통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모나드는 서로 대등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각 모나드는 자기 안에 우주 전체의 희미한 모습을 담고 있다. 과연 그런 조화를 어떻게 이룰 수 있을까? 그것은 하느님이 미리 정해놓은 예정 조화 때문이다. 라이프니츠는 그 조화를 예정 조화라고 불렀다.


파스칼은 인간은 두 가지 무한대 사이에 낀 존재였다.

무한하게 큰 우주와 무한하게 작은 분자와 원자, 우리 인간은 그 무한한 세계를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성과 경험은 유한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그 무한함을 그저 희미하게 볼 수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인간이 존엄한 이유는 사고하는 능력 때문이다.

우리는 우주의 가벼운 바람에도 쓰러지는 약한 갈대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생각하는 갈대다.

이 세상의 부와 쾌락은 어쨌든 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믿음이 맞고 그래서 내기에 이긴다면 이 땅에 사는 세월 동안 절제된 생활을 하고 이 세상에 대한 자비를 베푼 대가로 행복한 영생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탈리아 나폴리 출신의 잠바티스타 비코,

자연은 인간이 작품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수학은 인간이 발명했기 때문에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손으로 겨우겨우 만들어가는 것도 있다. 다름 아닌 역사다.

비코가 이룩한 가장 큰 공헌은 역사를 근대 철학이 중심에 올려놓았다는 사실이다.

역사는 이상적인 도시를 추구하는 과정이다. 인간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살 수 있는 완벽한 사회 말이다. 역사의 발전은 암중모색으로 시작하여 정점에 이르렀다가 쇠퇴기에 접어드는 순환을 반복한다.

이런 내용은 그의 작품 “새로운 학문”에서 자세히 나온다. 처음에는 신들의 시대가 도래했다.

즉 가장의 권위와 신에 대한 두려움에 모든 것이 집중된 원시사회였다.

그다음에 나타난 것은 영웅들의 시대였다. 이는 가장 용감하고 대담한 귀족들이 지배하던 시대였다.

그다음으로는 인간의 시대가 이어진다. 이는 가장 성숙한 철학이 확대된 시대로 현재 우리가 살고있는 시대이기도 하다.


존 로크는 프랜시스 베이컨에 의해 시작되어 홉스로 이어진 영국 철학자들이 경험주의 전통을 이어갔다.

권력의 분립을 최초로 지적한 사람, 그는 다수결로 법을 만드는 의회의 입법권이 존재해야 하며 그 법을 효율적으로 실행하는 행정권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시민 교육의 중요성을 설파했으며 학교 체벌을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객관적인 지식만을 교육할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타인들과 잘 어울려 살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의 타당한 의견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으로 교육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볼테르, 프랑스의 프랑수아 마리 아루에, 그는 스스로 이신론자라고 생각했다.

즉 자연이라는 거대한 기계장치를 돌아가게 하면서 동시에 자비와 인간에 대한 연대감을 바탕을 보편적인 도덕적 규범을 보증하는, 마치 훌륭한 시계공처럼 자연을 정비하는 신이 존재를 믿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의 가장 위대한 인물은 몽테스키외 남작, 샤를 루이 드 세콩다 이다,

몽테스키의 대표작은 법의 정신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의 공존을 지배하는 법칙을 연구하고 싶어 했다.

각 정부는 시민들에게 법과 질서를 요구한다. 이 법과 질서는 포학한 전제정치에서는 두려움, 귀족계급의 편견을 바탕으로 한 군주정치에서는 공포 그리고 공화국에서는 시민의 덕이 될 것이다.

몽테스키외는 대중의 자유를 가장 많이 보장하는 삼권의 분리를 존중하는 정치 체제를 선호했다.


디드로와 달랑베르 백과전서 유명한 수학자였으며 과학적 방식을 신봉하는 사람이었다.

그는 프랜시스 베이컨의 뒤를 이어 인간에겐 세 가지 인지 능력이 있다고 주장했다.

사건을 수동적으로 기록하는 기억력, 그 사건을 서로 연결하여 새로운 결론을 이끌어 내는 이성,

그런 재료를 가지고 서로 과감하게 결합하는 상상력이 바로 그것이다. 예컨대 기억력은 역사에서 비롯된다. 이성의 능력은 철학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상상력은 예술에서 나온다. 즉 문학, 그림, 조각 등이다.


루소는 사회계약론에서 이상적인 국가 제도를 제시하고 있다.

여기서 개인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시민의 자유와 재산의 권리를 얻기 위해 각자의 자연 상태의 자유를 포기해야 한다. 모든 결정을 시민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이 결정은 모두의 의지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의지를 표현한 것이다.


은 확고한 회의주의자다.

종교의 기원은 다신론이라고 주장한다. 즉 신은 선하거나 악한 가공의 본질로 인간이 자신에게 해롭거나 유익한 자연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만들어낸 것이라는 주장이다.

우리의 삶은 불안으로 가득 차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을 달성할 수 있을지 알 수가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도움과 행운을 비는 신비스런 마법의 대변인을 만들어낸다.


독일의 철학자 임마누엘 칸트 계몽주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

칸트에게 이 인간에 대한 주제는 위대한 질문 세 가지를 내포하고 있다.

첫째,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둘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셋째, 나는 무엇을 희망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는 것이 바로 철학을 학문적으로 이해하는 길이다.     

첫 번째 질문에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그 대답을 제시한다.

인간의 지식은 질료와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질료는 경험에 의한 감각으로부터 나오지만, 형상은 감각이 제공하는 자료를 조직적으로 정리하는 능력인 지성으로부터 나온다.

감각이 제공하는 질료가 없다면 우리의 지성은 텅 빈 상태가 되지만 지성이 제공한 질서가 없다면 감각의 자료는 혼란스럽고 무질서한 자료이며 정보가 될 뿐이다.

우리의 감각이 사물에서 느끼는 것과 우리의 지성이 그 감각의 자료에 제공하는 형상 사이의 결합이다.

칸트는 이 결과를 현상이라고 부른다.     

두 번째 질문,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인간은 이것을 할 것인가 저것을 할 것인가 끊임없이 의사결정을 해야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부여하는 것은 상황이다. 진정한 도덕적인 행동은 자율적이어야 한다.

강제적인 법에서 비롯되지 않으며 이성적인 존재의 자유의지의 결과 내가 받아들이는 행동이다.     

마지막 나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는가?

두 가지 측면에서 대답을 한다. 하나는 역사 및 정치적 측면이고 다른 하나는 종교적 측면이다.

그는 확고한 보편 원칙을 지지하는 사람이었다. 즉 모든 인간과 인간의 자율권은 국가, 인종, 사회적 계급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정치적 측면에서 이상주의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인간은 본성적으로 서로 돕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사상, 종교, 정치적 야심 등에서는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가장 이상적인 것은 영원한 평화다. 상호 이익의 조화에서 오는 평화, 그 평화를 달성하려면 국가는 공화국의 헌법을 만들어야 하며 세계적인 화해의 분위기를 조성하고 무력 전쟁을 금지하는 자유 국가들의 국제 연맹을 만들어야 할 것이다.


헤겔, 논리학은 초보 철학자가 관록을 쌓기 위해서 반드시 읽어야 하는 서적 가운데 에베레스트처럼 우뚝 서 있는 그런 책이다. 이성의 각 단계가 타당하기도 하고 필연적으로 거짓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실현된 이성의 전체적인 집단, 즉 전체적이고 절대적인 관념 만을 진리라고 간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고를 전개하는 이런 역설적인 방식을 변증법이라고 하며 이성은 우선 명제를 정립한 다음 반명제를 세워 그 명제를 부인한다. 그런 다음 명제와 반명제를 다시 생각하여 합에 도달하는데, 이 합은 명제와 반명제를 합하여 이 두 가지를 초월한 단계다. 변증법에서 가장 많이 인용되는 모델은 논리학이 서두에 등장한다.


마르크스는 정치 경제에 관한 자신의 저서에서 그 당시 도저히 지탱하기 어려운 생산 시스템을 고발한다.

산업 생산 수단이 주인들, 즉 자본가들은 시간이 갈수록 프롤레타리아 계층의 노동력을 더 싸게 산다.

따라서 프롤레타리아들은 처음에는 착취당하는 노동자로 나중에는 비참한 가난뱅이로 전락한다.

브로주아 자본가들이 봉건제도와 귀족정치를 끝내는 데 절대로 필요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사회적 계층도 계급도 없는 미래 사회를 건설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프롤레타리아를 해방시키고 우리 모두 평등하게 공동재산의 주인이 되는 사회 말이다.

따라서 사회적인 혁명은 도덕적인 요구나 윤리적인 명령이 아니라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가르치는 교육과 비판을 통해서 가속화해야 하는 역사적인 필연이다.


쇼펜하우어 대표작 의지의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

쇼펜하우어를 계기로 동양철학이 근대 유럽에 소개되었다. 쇼펜하우어는 우리가 현실에서 알고 있는 것은 존재하는 것, 즉 칸트라 현상이라고 명명했던 것의 표상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이 세상은 고통이다. 욕구를 절대 만족시킬 수 없으며 모든 존재하는 것은 최종 목표도 없이 계속해서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은 욕구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욕구를 자제하고 달래며, 심지어 지칠 줄 모르는 게걸스런 욕망을 포기하기까지 한다.

첫째는 예술을 통해서다. 예술은 우리로 하여금 이 세상과 거리를 두게 하며 고통이나 욕구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표현한다.

그 다음은 동정심이다. 동정심은 모든 도덕의 토대이며 다른 존재, 즉 사람뿐만 아니라 동물들의 고통을 이해하게 해준다.

마지막으로 신성함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살고자 하는 모진 욕구를 포기하고 결국엔 해탈을 경지로 조용히 사라지는 사람들도 있다. 고통스런 자극이나 욕구가 없는, 불교에서 말하는 무의 경지로 말이다.


프랑스의 오귀스트 콩트는 독서를 많이 하는 것을 반대했다.

왜냐하면 독서는 편견이 없는 개인적인 추론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사회학의 선구자, 인간을 특징짓는 것은 지식이다.

모든 사회는 세 가지 단계를 거친다.

첫째, 신학적인 단계로 이 단계에서는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초자연적인 존재에 의존한다.

두 번째, 형이상학적인 단계에서는 의지나 절대적인 것처럼 추상적인 힘이 현상의 원인이다.

세 번째 실증적인 단계에서는 모든 사건을 상호 관계와 그 관계에서 비롯된 법칙에 의해 설명한다.

콩트는 자기가 살았던 그 당시를 두 번째 단계의 끝이자 세 번째 단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했다.


벤담의 공리주의, 공리주의의 주장은 이런 원칙을 토대로 하고 있다.

최대한 많은 사람이 최대의 행복을 누려 해야 한다는 원칙이다. 벤담은 도덕을 물리학과 같은 정밀한 과학으로 변화시키고 싶어했다. 문제는 고통과 행복을 계산하는 것이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다.

공리주의 사상을 더 설득력 있게 설명한 사람은 존 스튜어트 밀이었다. 그는 질적인 쾌락주의를 옹호한다. 즉 기쁨의 순위를 정해야 하며 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인간이 되는 것이 더 낫다.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이 세상을 고통이 가득하고 동정심이 없는 혼돈과 무자비가 난무하는 곳이라고 생각했다.

의미도 없고 숭고하고 조화로운 목적도 없는 곳으로 말이다.

다윈은 자연의 모든 존재는 창조자의 계획에 의해 움직인다는 미신을 타파했다.

즉 현실에서는 나름의 방식으로 가장 잘 적응한 생존자로 선택된 개체가 우세한 개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들은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후손의 수를 최대한으로 확보한 자들이다.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영원히 살아남고 싶은 삶의 냉혹한 폭풍에는 결승점도 없으며 다만 살아남을 수 있는 자만이 살아남을 뿐이다.

이런 냉혹하고 고통스런 현실 앞에서 쇼펜하우어는 삶의 의지를 포기할 것을 권유한다. 이는 지독한 삶의 위기에서 체념과 순종을 권하는 다른 종교적인 태도와도 흡사하다.

니체는 부조리하고 비극적인 삶의 순간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황홀한 영광의 순간과 끔찍한 고통의 순간들도 함께 말이다. 결국 삶을 사랑하라는 것이다. 그의 사상이 잘 요약되어 있고 가장 유명한 책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이다.


미국의 에머슨, 초월주의, 스피노자를 비롯한 몇몇 철학자들과 헤겔의 이론을 결합한 철학으로 범신론적인 관념론이다.

즉 현실은 우주의 초월적인 힘에 의해 끌려간다는 것이다. 이 힘을 대령, 혹은 그냥 신이라고 부를 수 있다. 자연의 세계나 인간이 육체는 모두 이 대령에서 비롯된 것이다. 물론 자연은 직접적으로 신의 지배를 받으며, 인간은 의지에 따라 움직인다는 차이점이 있다. 가장 행복한 삶이란 그 대령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철학적인 사색이나 시를 통해 대령의 명령을 알 수 있다.


프랑스의 베르그송, 대표적 저서 창조적 신화, 생명의 기원과 본질을 다루고 있는 작품이다.

모든 것은 어떤 태초의 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한다. 그 힘을 생명의 약동이라고 한다. 생명의 약동은 시간이 지속되는 동안 창조적인 에너지를 발휘한다. 단계적으로 진보하는 방식이 아니라 서로 다른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즉 실물, 동물, 인간이다. 이 세 가지 서로 다른 형태는 공통적인 창조의 핵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유사한 점도 있다.


프로이트, 정신에는 의식적인 부분과 무의식적인 부분이 있다.

무의식은 의식보다 훨씬 더 많은 부분을 차지한다. 무의식은 성적 쾌락을 요구하는 본능적인 욕구로 구성되어 있으며, 이 욕구는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거나 수치스럽게 하며 그래서 감추고 싶은 경험이기도 하다. 이런 정신적인 부분을 프로이트는 ‘이드’라고 부르며 이는 ‘자아’라고 하는 의식적인 부분과 대립된다. ‘자아’라고 하는 의식의 부분을 즉각적인 쾌락뿐만 아니라 현실주의와 안전을 추구하는 욕구를 충족시키면서 삶을 관리하고자 노력하는 영역이다. 우리가 간혹 겪는 노이로제나 장애는 ‘이드’의 충동과 ‘자아’의 이성성 사이에서 일어나는 갈등에서 비롯된다. 이 과정에 개입하는 것이 ‘초자아’다. 초자아는 유아기에 배운 사회의 가치와 도덕을 구체화하는 단계다.

정신분석이 시도하는 것은 말을 통해 무의식의 것을 의식으로 불러내고 망각에서 회복하여 정신병을 치료하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는 갈등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프로이트는 정신에서 정상적인 것은 서로 상대적이라고 주장한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흔히 정신착란과 제정신을 구분하는 분명한 경계를 허물어뜨린 것이다.


하이데거의 대표작은 존재와 시간이다.

이 책은 현대의 인간에 관한 일종의 철학적 인류학으로 미완성 작품이다. 시간은 우리를 구성하지만,

그 세 단계(과거, 현재, 미래)에서 본래적으로 사는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미래다.

미래에는 우리가 이미 정해졌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부인하고 무로 돌아가게 하는 것이 존재한다.


사르트르는 파리에서 태어났다. 베를린에서 현상학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연구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철학 작품은 존재와 무이며, 이는 실존주의는 휴머니즘이다. 라는 짧은 책의 완성본이다. 사르트르에 의하면 존재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하나는 즉자존재(卽自存在)다. 이는 닫히고 불투명하며 단단한 사물이 존재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대자존재(對自存在)로 이는 주어진 모든 것을 부인하고 초월하는 관계로 만들어진 존재다.

즉자존재는 스스로 있는 존재이며 대자존재는 스스로 있지 않는 존재라고 말할 수 있다.

신은 불가능한 존재로서 즉자이면서 동시에 대자이다. 인간에게 최악이 유혹은 스스로 신으로 변신한다는 유혹이다. 인간으로 변한다는 유혹에 항복한 전설적인 신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시몬 드 보부아르는 사르트르의 학교 동창이자 평생의 연인이며 협력자, 친구 그리고 경쟁자였다.

저서 고별식, 제2의 성, 노년


카뮈는 모든 종류의 도주를 거부한다.

그에게 적절한 것은 무의미한 삶을 받아들이는 것이고 개인적인 모험이나 타인들과의 연대감을 통해 개인적으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그리스신화에 등장하는 인물인 시지포스는 커다란 바위를 산꼭대기로 올리는 형벌을 받았다. 바위는 산꼭대기에 도달하면 다시 굴러 떨어져서 시지포스는 바위를 산꼭대기로 운반하는 일을 영원히 계속해야 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인간은 죽음으로 끝나는 과업에 붙잡혀 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타인들과 함께 공유하는 운명의 공동체와 우애를 느낀다. 어쨌든 잔인하고 질투심 많은 신들이 내린 형벌에도 불구하고 시지포스는 행복하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한나 아렌트, 독일에서 출생, 유대인, 에드문트 후설, 카를 아스퍼스, 그리고 하이데거의 제자, 특히 하이데거와는 은밀한 연인 관계 유지, 미국으로 도주 미국 시민으로 국적을 바꿈.

사회적으로 중요한 것은 활동적인 삶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의 활동에는 세 가지 형태가 있다.

첫째는 노동(자신의 몸, 집안을 돌보는 일, 일상적인 삶의 유지)이다.

둘째는 직업(소비재와 도구의 생산)이며,

셋째는 행위다. 다시 말하자면 사람들의 상호작용이며 공동의 삶과 관련된 의사결정이다.

즉 넓은 의미의 정치인 것이다. 인간은 행위를 통해 실제로 자유를 행사하지만, 헤겔처럼 죽음을 향한 존재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삶의 출산을 향한 존재로서다.

우리는 죽기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출산하기 위해 사는 것이다.


스페인의 여성 철학자 마리아 삼브라노, 이론적인 형태가 아니라 실제적이고 적극적인 형태로 이 분야에 참여했다. 마리아 삼브라노는 마드리드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신은 인간이 불안하고 초조한 삶에서 피해망상에 사로잡힐 때 나타난다. 그러면서 한편으론 불안감이 늘어나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론 그 불안 속에서 우리를 지탱할 수 있다. 신앙심은 우리의 나약함, 무방비 상태를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한 인간관계의 한 방식이다.      


책 소개

이야기철학, 2012. 4. 9. 페르난도 사바테르 지음, 유혜경 옮김, 최훈 감수, 웅진 지식하우스.


페르난도 사바테르 : 1947년 스페인에서 출생, 마드리드 종합대학교 철학박사, 파이 바스코 대학교 윤리학 교수, 마드리드 종합대학교 철학과 교수


최훈 : 서울대 철학과 졸, 철학박사, 강원대학교 교수

유혜경 : 한국 외국어 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 석,박사 과정 수료, 전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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