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서조 May 06. 2023

이재운 지음, 『징비록(懲毖錄)』

『전시재상 류성룡의 임진왜란 7년 기록』

 이 책의 부제는 『전시재상 류성룡의 임진왜란 7년 기록』이다. 

이효원의 「호종 일기」와 더불어 임진년 일본이 조선을 침공한 사료로써 존재한다.     

 

임진왜란은 서기 1592(임진, 조선 14대 임금, 선조 25년) 4월 13일 일본은 조선을 공격하여 4월 15일 동래성 첫 전투를 시작으로 1597년 정유재란을 거쳐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 죽음으로써 끝이 났다.     


이에 앞서 1590년 일본에 동인 김성일, 서인 황윤길을 일본에 통신사로 보내어 1년 뒤인 1591년 3월 1일 귀국 보고를 한다. 황윤길은 일본이 침공할 것, 김성일은 안 할 것이라는 상반된 보고를 한다.      

조정은 동인 김성일의 주장을 채택하고 허송세월하는 동안 일본은 조선을 침략하기 위해 나고야에 전진기지를 마련하는 축성을 하고 무기와 군량, 군함을 축조한다.     


왜란을 맞은 조선의 왕은 4월 30일 새벽 돈의문을 통해 개성을 거쳐 평양, 의주까지 북으로 도망간다. 

당시 조선의 인구는 70만 호에 400만 명이다. 군사로 동원가능한 16세 이상 60세 미만의 남자는 85만 명이다. 일본은 5백만 명이 넘는다. 군사만 30만 명이 넘었다. 명나라는 6천만 명이나 무능한 황제와 부패로 인해 동원할 수 있는 군사는 10만 명 내외였다.     


조선의 화력은 휴대용 소총인 승자총통, 다연장, 다연발 포켓 신기전, 휴대용 수류탄 비격진천뢰, 수군이 보유한 거북선과 판옥선은 세계 제일 수준의 군함이고, 네 가지 총통인 천지현황은 사정거리 1㎞에서 2.5㎞까지 되었다. 특히 적선을 뚫고 들어가 분열 폭파하는 차대전은 사거리가 2㎞에 달했다. 일본군의 주력 무기인 조총은 유효 사거리는 50m로 탄약을 장전하는 데 2분이나 걸렸다. 성능으로 볼 때 조선군의 화살이나 사실상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전시 임시기구인 비변사(군무 총괄기관, 전시 국가안전보장회의)는 독립 기구가 아닌 전시 자동으로 구성되는 임시기구인 만큼 다른 직에 있는 대신들이 겸직한다. 3정승, 6조판서, 훈련도감, 어영대장, 수어사, 총융사, 금위대장 등 군사 부서의 장, 강화, 개성, 광주, 수원 유수는 당연직이고 전직 대신들 중 경상, 전라, 평안, 함경의 관찰사와 병사, 수사를 지낸 종2품 이상의 관원을 지변사재상이라는 이름으로 구성되어있다.    

  

1517년(중종 12년) 6월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1524년 여진족 침입, 1544년 사량왜변, 1555년 을묘왜변 때 세 번 소집되었다. 을묘왜변 이후 상설 관청을 마련하였다. 변방과 주요 군무를 비변사가 총괄하고 군사 기밀을 처리하였기 때문에 병조나 의정부에서조차 군사 기밀을 알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했다. 이 중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비변사 당상이라고 하여 군무를 총괄하는 최고 위원 노릇을 했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됐다는 보고로 1592.4.17. 소집된 비변사 회의에서 낸 결론은 일본이 침공을 풍신수길이 일으킨 “란”으로 하여 ‘임진왜란’이라고 규정한 것이 전부였다.     


  전쟁이 나자 도망간 왕은 명나라에 구원을 요청한다. 명은 이여송을 제독으로 하여 4만 3천 병력을 보낸다.

조명 연합군에 의해 일본군이 후퇴하고 3년 뒤 정유년 일본은 다시 침공한다. 이번에는 경상도가 아니고 전라도를 택했다. 이때도 조선의 왕은 명에 원군을 요청한다. 


명은 제2의 원군은 마귀(麻貴, 위구르인)를 제독으로 8만 명의 군사를 보낸다. 

이때 명이 황제 주익균은 “몇 해 전에 왜적이 침공하여 의주까지 옮겨와서 애절하게 구원을 청하였다. 짐이 측은히 여겨 군사를 보내 구원해 주었는데 어찌하여 몇 해 동안 휴식하면서도 훈련도 더 하지 않고 스스로 와신상담을 잊고 토붕화해를 좌시했더란 말이냐. 교활한 왜적이 다시 쳐들어오자 전과같이 똑같은 말로 장황하게 아뢰어 우리 구원을 청하니 하는 수 없이 우리 명군이 다시 동병하게 되었다. 조선이 스스로 부국강병에 앞장서 나라 재물을 늘리고 병장기를 손질하고, 스스로 요새지를 지키고, 방패와 창을 높이 쳐들어야 할 것이다. 어명을 엄격히 선포하여 힘써 싸울 계략을 세우고 군법을 거듭 밝혀 도망하는 죄를 준엄하게 다스리라. 충성하는 자를 높이고 의리를 고취해서 나라의 안전을 도모하라.”라고 꾸짖는다.    

 


책을 읽고


 조선의 선조 편을 읽다 보면 언제나 가슴이 답답하고 부끄럽기까지 하다. 

망국의 길을 가는 것은 나라의 지도자가 어떻게 처신하느냐에 따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조정래의 팔만대장경, 이재운의 소설 토정비결을 읽고 나서도 울분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런 역사는 되풀이된다. 나라의 관리가 부패하고, 지도자가 무능하면 망국의 길을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요즘의 탄핵정국도 비켜 갈 수 없는 역사의 한 페이지이다.      


조선 중기에 3%의 양반이 97%의 백성을 다스리고 특히 하층민에 대한 사대부의 횡포는 가히 짐작할 수 없을 만큼 혹독했다. 그러나 난리가 나고 나라가 위태로울 때 이를 구하는 것은 그 97%의 핍박받던 백성이며, 그중에도 최하층민이 목숨을 바쳐 싸웠다.     


이제 조선 시대는 아니다. 우리의 손으로 지도자를 선출하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도 3%의 관리가 국가를 경영한다. 나머지 97%의 백성은 생업에 종사할 뿐이다.      

백성이 깨끗하면 지도자도 깨끗할 수밖에 없다. 누구를 탓하기 전에 나부터 생각을 바꿔야 한다. 


신중한 선택과 검증만이 내가 살 수 있는 길임을 알아야 한다. 민주주의가 다수결이라는 결점이 있지만, 

다수의 의견에 승복하더라도 소수가 존중받을 수 있는 사회를 누가 만들 것인가. 

그것은 민주주의의 결점인 다수, 즉 97%의 국민이 만들어 가야 할 숙제이다.     


왜놈이 쳐들어온 난리 속에서도 자기의 당리당략을 위해 일선에서 전투 중인 장수를 처형하고, 징계하여 사기를 떨어뜨리고 자기의 입지를 굳히는 일이라면 세 치의 혀로 왕의 판단을 어지럽게 하는 무리가 더 출세하고 승승장구하여 후손을 퍼뜨리게 할 수는 없다. 역사처럼 언제나 매국노는 존재한다. 다만 모습이 다를 뿐이다.     

  정부 기구가 아무리 좋으면 무엇 하나? 조선의 비변사같이 일본이 코앞에 쳐들어왔는데 대책은 없고 ‘왜변’이냐, ‘왜란’이냐를 가리는 것이 중요한 일이 된 정부 기구가 오늘날에는 없는 것인가?      


모여앉아 일선에서 목숨을 걸고 인명을 구하는 사람들을 모함하고 사기를 떨어뜨리면서 자기들만 공을 세우는 것 같이 포장하는 허울 좋은 위원회, 대책기구가 세월호 7시간 동안이 참사를 부추겼다. 국민의 혈세를 낭비하면서도 갑질을 하는 권세가들, 공직자들 모두 조선 시대로 보내야 할 것이다.     


  작가의 말에 의하면 ‘징비록’이 일본에서 먼저 읽히고 왜 침공에 실패했는가를 분석하여 조선말에 다시 쳐들어왔다.라고 한다. 이번에는 임진년 같은 실수를 안 하고 완벽하게 조선을 정복하겠다.라고 하여 36년간 조선을 지배하였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 여전히 분단된 조국에서 징비록이 깨우치는 역사마저 외면하고 내 탓이 아니고 다른 사람의 책임인 양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살고 있다. 한심하다.     


책 소개

이재운 지음, 『징비록(懲毖錄)』 2015. 2. 2. 책이있는마을, 13,800원.

     

류성용(柳成龍 1542~1607) 조선의 영의정     


이재운 - 충남 청양에서 출, 중앙대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졸, 



매거진의 이전글 정형남 지음. 『진경산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