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길을 나는 잘 가고 있는 걸까?」
이 책의 부제목은 「내 길을 나는 잘 가고 있는 걸까?」이다. 요즘 나를 찾아가는 독서를 하고 있다. 이 책을 읽은 동기다.
내 삶을 실질적으로 변화시켜 만족감과 행복감을 주는 최종 주자는 지식이 아니라 ‘행위’이다. 내가 아는 것과 실행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아무리 좋은 지식을 많이 알고 있다고 해도 실천하지 않으면 소용없는 일이다. 불만스러운 상태에 있으면서 걱정만하고 상황을 개선하기 위해 아무런 노력을 기울이지 않고 있다면, 그런 나에 대해 절망해야 한다.
핵심은 ‘내가 처한 상황을 인내하며 살아가기’가 아니라 ‘어려운 여건에도 불구하고 이를 인정하고 변화시키기 위해 구체적으로 행위 하기’에 달려 있다. 내 삶의 의미는 ‘행위’를 통해서만 확보된다. ‘행위’만이 내 삶을 새롭게 만들 수 있다.
‘나’는 정확히 말하면 ‘나의 삶’이라고 할 수 있다. ‘나’는 구체적으로 일상생활을 하는 사고와 신체를 아우른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나’를 어떤 상태, 형태로 살 것인가? 나는 어떤 삶을 영위해야 할까? 내 삶을 내가 사는 것 같은데도 ‘괜찮은 나’로 사는 길은 순탄치 않다. 내가 살고 싶은 대로 살 수 없다. 건강하고 즐겁게 웃으며 살기를 바랐지만, 내가 던져진 곳은 내가 꿈꾸던 세계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세상과 내가 살아가는 세상은 다르다. 나는 사태가 실제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알지 못한 채 삶을 살아간다.
나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나는 생존과 생활을 위해 나 아닌 것, 즉 타자와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 나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가 아니고 무언가와 항상 관계하고 있는 ‘현재 진행형’으로서 타자를 향해 있으면서 타자와 소통하고 있다고 할 때, 그 타자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가 곧 ‘내가 무엇인지’를 결정한다.
나는 내가 선택하지 않은 부모라는 존재에 의해 그들의 집에서 자의적으로 태어난다. 내가 태어난 순간 부모에게 내가 낯선 만큼 나에게도 부모는 물론 모든 것이 낯설다. 출생이라는 사건을 통해 ‘세상에 던져진 존재’인 나는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 나는 알기 위해 세상에 태어난 게 아니다. 하지만 알지 못하면 세상을 살아갈 수 없다.
지식을 가진 자가 지식을 갖지 않은 자에 대해 힘(권력)을 행사하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힘의 우위를 점령하려는 자는 상대방에게 자신은 드러내지 않으면서 상대방을 알고자 하는 전략을 구사한다. 아는 것이 힘이라는 말은 타자에 대한 지식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손자병법에 “상대를 모르고 나도 모르면 매번 싸움에서 반드시 위험에 빠질 것”이라고 경계한다. 대상에서 질서를 찾고자 하는 모든 지적 활동의 결과물은 보통 ‘법칙law’나 ‘이론theory’로 불린다.
연금술은 금이 아닌 금속을 금으로 만드는 기술이다. 나는 태어나면서 무엇인가 되어야 할 사람이지 이미 무엇이 되어 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러므로 금이 아닌, 납인 나는 금이 되기를 꿈꾼다. 납은 금이 되고 싶다. 나는 금이 되어야 참된 ‘나’가 된다. 누구나 무언가를 원하며 산다. 이때 ‘절실함’이 있어야 한다. 자신이 원하는 것을 꼭 성취하겠다는 절대적인 의지가 있어야 한다.
무언가를 절실하게 이루고자 하는 사람은 자신의 길에 다른 가능성이 들어설 여지를 남겨 두지 않는다. ‘되면 좋지만, 안 돼도 그만이다’가 아니라 ‘꼭 되어야 한다. 안 되는 길은 이미 길이 아니다’라는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한다. 만물의 정기는 정직하게 운행한다. 온 힘을 다해 오직 한 길을 향할 때 만물의 정기는 거기에 감응하여 화답한다.
행복한 인간이란 자신의 마음속에 신을 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마음은 속삭인다. 행복이란 사막의 모래 알갱이 하나에서도 발견될 수 있다. 모래 알갱이 하나는 천지창조의 한순간이며, 그것을 창조하기 위해 온 우주가 기다려 온 억겁의 세월이 담겨 있다. 삶에 과도기란 없다. 현재가 미래의 목표를 위한 수단으로 전락할 수 없다. 매 순간이 나에겐 빛나는 순간이다. 내가 아무리 어설프고 부족해도 나는 내 삶을 사랑할 충분한 이유가 있다. 현재의 나를 사랑하지 않고 밝은 미래를 기약할 수 없다. 현재의 나를 보듬고 아끼지 않고는 생산적인 미래가 보장되지 않는다. 삶에서 비약은 없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그 어려움을 겪고 나는 껴안아야 한다.
나는 타인에게서 인정받아야만 사회로 진입할 수 있다. 스스로 아무리 ‘나는 유능하다’라고 해도 타인이 나의 능력을 인정하지 않으면 사회로 진입하기 어렵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남이 생각하는 나’와 같지 않다. 내가 나를 보듯이 남이 나를 볼 것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내가 보는 나와 타인이 보는 나의 차이는 필연적인 갈등 상황이다. 내가 생각하는 ‘나’가 아니라 ‘타인이 생각하는 나’가 현실에서 힘을 얻는다. 나를 보는 ‘나’는 나 혼자뿐이지만 나를 보는 남은 무수히 많으며, 이 무수히 많은 시선이 현실에서 나를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힘으로 작동한다.
타인의 시선과 인정은 일상생활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남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에 괘념치 말라고 하지만, 나에 대한 타인의 평가는 그렇게 간단히 넘길 사항이 아니다. 남의 눈치 볼 필요 없이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하지만 그게 생각처럼 쉽지 않다.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며 행동하지 않으면 나에게 돌아오는 비난과 불이익을 감당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게다가 타인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 문제는 나의 자존감과 자신감에 관련된 문제이다.
낯섦을 수반하지 않는 새로움이란 없다. 낯선 것을 만났을 때 가장 자연스러운 최초의 반응은 거부감이다. 그러나 새로움을 통해 나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본능적으로 일어나는 거부반응에 굴복해선 안 된다. 이 낯선 것이 자신에게 다가와 새로운 가능성의 문을 열 수 있도록 생각과 감각을 항상 열어 놓아야 한다. 그래야 내가 의도하지는 않았더라도 우연히 맞닥뜨린 어떤 것이 내 성숙을 위한 발판 또는 계기가 될 수 있다.
나를 밖으로 열어 놓는 일은 새로운 나를 만나기 위해서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 틀릴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 놓아 나를 변화시키는 데에도 필요하다. 우리는 어떻게든 기존이 틀을 고수하면서 자신의 입장을 변화하고 정당화하려는 데 익숙해져 있다. 인간에게는 원래 가지고 있는 생각이나 신념을 확인하고 확장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경향을 확증 편향이라고 한다.
우리는 자기 생각과 다른 사태에 대해서 은연중에 인지를 거부하는 태도를 견지한다. 내가 만든 틀에 맞는 것은 옳고, 그렇지 않으면 틀렸다는 생각은 아집이고 독단이다. 서로 다른 생각들이 인정되는 열린사회를 지향하는 민주주의 사회에 독이 되는 태도다.
나는 경험을 통해 내 안에 무엇이 있는지 알게 된다. 나는 내가 누구인지를 마지막까지 알 수 없다. 나는 나 자신에 대해서 타자이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자라 아는 것 같아도 정작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내가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한 나를 만날 때 나는 놀란다. ‘내가 이런 사람이었나?’하고 스스로 의아하게 생각한다. ‘내가 모르는 나’를 깨닫게 되는 순간은 내가 나의 내면을 반성하며 성찰할 때가 아니라 외부에서 오는 예기치 못한 경험에 대한 나의 반응을 살필 때다.
어떤 음식을 먹어 봐야 그 음식에 대한 취향과 소화 여부를 판단할 수 있다. 내가 막연하게 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나와 실제의 나는 꼭 같은 게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내가 나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실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나 자신도 알지 못하고 있는 나를 알기 위해, 새로운 나의 출현을 위해 경험에 나를 활짝 열어 놓아야 한다. 경험이란 나의 잠재력을 탐색하는 실험장이다.
여기서 문제는 기존의 내 생각에 얽히지 않는 낯선 것에 대한 두려움이다. 내가 도전하고 싶은 많은 새로운 일들은 이미 다른 사람들에 의해 충분히 반복적으로 검토되어 어느 정도 안전이 보장되어 있다. 일상에서 찾는 새로운 경험은 대개 나보다 앞선 사람들에 의해 이미 점검이 끝난 경험이다.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 세상의 많은 일은 안 해서 못 하는 것이지 못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다. 항상 의지가 관건이다.
사회는 나에게 열려 있고 나도 사회에 열려 있다. 사회 역사의 발전은 이렇게 나와 사회 상호 간의 개방과 소통에서 가능하다. 어떤 나인가, 어떤 사회인가는 전적으로 나와 사회가 쓰고 있는 안경에 의존적이다. 하지만 ‘안경’은 태도의 문제이지 사실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세상을 있는 대로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보는 대로 세상이 있는 것이다. 버나드 쇼는 “삶을 사는 방식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비극적으로 사는 법이고, 다른 하나는 희극적으로 사는 법이다. 나는 후자를 택했다.”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나의 징표는 내가 ‘욕망’한다는 사실에 있다. 욕망과 욕구는 모두 결핍에 근거한다. 욕구는 ‘자기’에 초점이 맞춰진 데 반하여 욕망은 ‘타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욕구는 자기의 결핍감에서 비롯한다면, 욕망은 타자를 자기 것으로 삼으려는 의지에서 생겨난다. 욕구는 나에게 본래 주어진 것에 결핍을 느끼면서 부족한 것을 원하는 자연적 본능이지만, 욕망은 내적인 결핍을 의식하지 않으면서도 타자를 자기 것으로 만들려는 의지적 충동이다. 예를 들어 배고픔을 느끼는 것은 욕구다. 반면 배가 고프지도 않은데 맛있는 음식을 먹고 싶다는 것은 욕망이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성숙한 사랑은 자신의 통합성, 곧 개성을 유지하는 상태에서의 합일合一이다. 사랑은 인간으로 하여금 고립감과 분리감을 극복하게 하면서도 각자에게 각자의 특성을 허용하고 자신의 통합성을 유지 시킨다. 사랑에서는 두 존재가 하나가 되면서도 둘로 남아 있다는 역설이 성립한다.”라고 했다.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자연의 시간을 주관한다. 기회의 신으로 불리는 카이로스는 의미의 시간을 주관한다. 기회의 신인 카이로스는 자신에게 다가온 기회를 쏜살같이 낚아채는 능력을 지닌 데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기회’란 곧 ‘자신에게 의미 있는 것’을 뜻한다. 타이로스의 시간은 의미와는 무관하게 자연적으로 흘러가는 크로노스의 시간과 구별된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주어진 대상 혹은 사태에 내가 부여하는의미의 시간이다. 이 시간은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밖에서 흘러가는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인간의 삶은 물리적으로는 크로노스의 시간에 지배받지만, 의미상으로는 카이로스의 시간에 따른다.
카이로스의 시간은 양이 아니라 질, 시간의 넓이가 아니라 깊이 그리고 시간의 경과보다는 시간의 정지에 관심을 둔다. 그런 의미에서 카이로스의 시간은 인간적인 시간이다. 인간이 부여하고 생산할 수 있는 시간이다.
영국의 공리주의자 밀(J. S. Mill, 1806~1873)은 『자유론』에서 “유일하게 가치 있는 자유는 우리가 다른 사람에게서 그들의 행복을 뺏으려고 하거나, 행복을 얻으려는 그들이 노력을 방해하지 않고 우리 자신의 행복을 자신의 방식으로 추구하는 자유이다. 각 개인은 신체적이든 정신적, 영적이든 자신의 건강을 책임진 수호자다. 인류는 각자 자기가 좋아하는 생활방식을 서로 허용함으로써 이익을 얻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좋다는 생활방식을 강요해서 얻는 것보다 훨씬 큰 이익을 얻는 방법이다.”라고 했다.
자유를 원하는 자는 무조건 어떤 것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소극적 자유가 아니라 자신이 원하는 것을 실현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법을 강구하는 적극적 자유를 지향해야 한다. 진정 자유롭게 살 수 있으려면 나는 타인이 만든 틀에 머물지 않고 나를 자유롭게 할 수 있는 틀을 찾아 나의 길을 개척해 가야 한다.
책 소개
『나를 찾아가는 철학여행』 유헌식 지음. 2018.10.10. 북스코프. 267쪽. 13,800원.
유헌식.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괴테대학 철학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단국대 철학과 교수. 한국헤겔학회 회장 엮임. 저서. 『철학 한 스푼』, 『행복한 뫼르소』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