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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수 없는 나』

「나도 모르는 나의 존재에 대하여」

by 안서조

이 책의 부제목은 「나도 모르는 나의 존재에 대하여」 이다.


문득 ‘내 인생은 뭐지?’라는 의문이 들 때가 있다. 한창 일을 하거나 가사 노동을 하던 중 ‘내가 없다’라는 결핍감이 엄습해 올 때도 있다. 거꾸로 하고 싶은 일만 하다가도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이 뭐였는지 알 수 없게 되는 경우도 있다. ‘뭘 해도 허무하다’라는 기분이 들 때도 있다. 이때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지게 된다.


저자는 이 책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의 “해답은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하지만 누구나 이 물음 속으로 끌려 들어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도 분명하다. 사람들은 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되면서 비로소 가 된다. 내가 너라고 부르는 것은 너한테는 이며, 네가 너라고 부르는 것은 나한테는 라는 그런 상호성을 이해하고 나서 비로소 나나 너라는 말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나’에게 던지는 질문은 보통 내게 고유한 것, 타인에게는 없고 나한테만 있는 것은 무엇인지 묻는다. 이렇게 묻고 있는 자신에 대해서 자신의 내면을 탐색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나한테만 있는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누구인지를 묻고, 자신의 내면을 탐색한다. 마음이나 신체적 능력, 사회적 지위, 성격이나 외모에 대해, 하지만 이게 정말 올바른 질문일까?


‘나’란 대체 무엇인지를 생각할 때가 있다. 이렇다 저렇다 해도, 결국은 단 하나밖에 없는 나, 나도 모르는 사이에 이렇게 존재하고 있고, 태어나지 않았으면 좋았다고 생각해도 이미 늦어버린 나. 그리고 언젠가 죽음이 찾아오면 사라져 버릴 것 같은 나, 그리고 결국 누군가의 기억에서도 사라지고, 존재 했는지조차 더는 분명하지 않고, 그것이 문제조차 되지 않는 그런 때가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몸에 관해 아주 조금밖에 모른다. 등이나 항문을 실제로 본 적이 없다. 아니, 타인이 나를 나로 인정하고 기억해 주는 그 얼굴을 공교롭게도 당사자인 나는 평생 볼 수 없다. 거울이나 사진으로 시간차를 두고 확인할 수는 있다. 하지만 내가 타인을 마주하고 있는 순간의 바로 그 얼굴(나 자체)을 나는 볼 수 없다. 나를 형성하고 있는 이 신체의 내부에 대해서는 더더욱 알 수 없다. 병이 난 것 같아도 거기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니체는 “나에게 가장 먼 존재는 나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병에 걸렸을 때, 머리가 아프고, 재채기가 나오고, 종기가 돋고, 출혈이 있고…, 몸이 이런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의사에게 간다. 의사는 청진기를 대고 등을 톡톡 두드리며 혈액과 소변 검사를 한다. 때로는 X레이나, CT 기기를 이용한 검사도 한다. 의사의 진단에 따라 가슴을 쓸어내리거나, 혹은 큰 충격을 받는다. 내 몸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우리는 잘 알지 못한다. 내 몸의 회로에 의사라는 타인이 개입해야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것 가운데 자신의 얼굴이 있다. 얼굴은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다. 다른 사람들이 이 얼굴을 보고 나를 ‘나’라고 인정한다. 하지만 얼굴을 나는 직접 볼 수 없다. 얼굴은 내 얼굴이라기보다 타인이 보기 위해 존재한다고 하는 편이 맞을 정도다. 얼굴은 객관적인 사실로 나를 나답게 하지만, 내가 유일무이한 존재로서 지금 여기 있다는 감정을 내부로부터 확고하게 지탱해 주지는 못한다. 심각한 사고로 더 이상 타인이 이전의 나라고 인정 해주지 않을 정도로 얼굴이 달라져도 내가 나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이렇게 생각하면 내가 다른 누구와도 바꿀 수 없는 이 세상에 단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라는 것이 사실이라기보다 하나의 애절한 소망처럼 보인다. 자신이 불안정하다고 느낄 때, 혹은 자신의 존재가 무척이나 희박해졌다고 느낄 때, 사람은 자신에게 하나의 ‘규칙적인’ 형태를 요구한다. 하지만 대부분이 ‘규칙적인 것’은 환상이다. 학교든 회사든 규칙적인 것이 없다고 해서 내가 없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정년을 맞아 매일 같은 시각에 출근할 필요가 없어졌을 때, 사람은 대단히 불안정해지는 것이다.


‘나의 발’이라 할 때, 나와 발이 무슨 관계인지 생각하기 시작하면 바로 미궁 속으로 빠지고 만다. 나는 발인가? 아니다. 나는 발을 소유하고 있는가? 아마 그렇다. 몸이 나의 소유물이라고 하면, 소유물은 양도나 교환할 수 있다. 발부터 순서대로 자신의 몸을 하나하나 다른 몸과 바꿔도 나는 나일 것이다. 하지만 상상이 복부 근처에 달하는 지점부터는 점점 야릇한 기분, 꺼림칙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다. 몸은 내 소유물이 아니라고.

내가 몸인지, 몸을 소유하는지도 확실하지 않은 채 우리는 자신이 자신의 몸 피부 안쪽에 있다고 막연히 믿고 있다. 나를 지금의 ‘나’로 존재하게 하는 신체적 조건이 그저 하나의 가능성이 구체화 된 것에 지나지 않고, ‘내’가 존재하는 데 있어 반드시 결정적이지 않다는 것이 눈에 보이는 형태로 폭로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가 아닌가, 즉 누구를 자신과는 다른 것으로 간주하느냐는 질문이 된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물음은, 나는 누구를 ‘비非 나,-내가 아닌’으로 차별화함으로써 나로 존재 하느냐 하는 물음과 같다.


사람은 누군가의 자녀로 태어나, 자라고, 어른이 된다. 아들, 딸, 학생, 아버지, 어머니 등 이런 역할이나 속성 자체를 제거하면 그 사람을 만들고 있는 것 중 어느 것 하나 그 사람 고유의 것은 없다. 인격을 의미하는 영어 ‘person’ 어원이 라틴어 ‘persona’이고 이 단어가 원래 무대에서 착용하는 ‘가면’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것이 극 중 역할, 극중인물이라는 뜻으로 변하면서 지금의 인격이나 사람을 뜻하게 되었다. 우리가 어딘가의 회사원이거나 누군가의 아버지이거나 어느 모임의 회원인 것도 결국 어떤 특정한 사회적 의미 체계에 ‘의지하는’ 것이다. 사람은 이런 체계에 관여함으로써 비로소 실존하는 현실을 누릴 수 있다.


우리는 성별, 직업, 나이, 성격 등의 범주에 따라 자신을 구분하면서, 사람들 사이에서 공유되고 있는 의미의 좌표 안에 자신을 삽입하고 거기에 자리 잡는다. 그리고 한 명의 사람이 된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인가?’라고 묻지 말고, ‘나는 누구인가?’ 즉, 누구에 대한 특정 타자일 수 있는지를 물어야 한다.


세상은 내가 이해하고 상상하는 존재로서 내 세상의 내부에 있을 수밖에 없다. 내 세상에 외부는 존재하지 않는다. 타자와의 접점, 타자로 향하는 통로가 언제나 이쪽에서만 접근할 수 있다면, 어째서 우리 세상은 ‘나만의 세상’이 아니라, 우리의 세상, 내가 태어나기 전에도 죽은 후에도 계속 존재하는 세상일까? 어째서 이런 나를 초월한 세상이 지금 이 나의 의식, 나의 경험 안에서 성립되는 것일까? 자연스럽게 이런 의문이 든다. 내가 죽을 때, 이 죽는다는 경험을 누구와도 공유할 수 없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나는 살아 있을 때도, 사실은 이 경험을 누구와도 공유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결국 나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 어떤 타자도 가릴 수 없다는 뜻 아닐까? 그렇다면 ‘나’는 처음부터 죽어 있는 게 아닐까.


‘나’에 대해서 심각하게 고민했다. 결국 장자가 말한 ‘호접몽’이 세상의 진리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책 소개

『알 수 없는 나』 와시다 기요카즈 지음. 김소연 옮김. 2019.03.25. (주)문예출판사. 170쪽. 13,000원.


와시다 기요카즈(鷲田淸一). 임상철학을 탐구하는 철학자. 교토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에서 박사과정을 수료 했다. 간사이대학 문학부 교수, 오사카대학 대학원 문학연구과 교수 등 거쳐 오사카대학 총장 역임. 저서, 『사람의 현상학』 등.


김소연. 한국외국어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과 동덕여자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서울외국어대학원대학교 통역번역대학원에 출강하며 전문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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