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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와 만날 준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철학의 제안들」

by 안서조

이 책의 부제목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기술철학의 제안들」이다.


인간의 역사는 개인과 집단이라는 두 가지 차원이 있다. 현대 기술 사회도 마찬가지다. 현대 기술의 거대한 흐름 속에서 개인에게 부여되는 반성적, 비판적 사유의 책임이 있는가 하면 집단에서 수행해야만 하는 일도 있다. 일반 시민들이 기술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하다면 미래 기술 사회가 비인간화될 가능성이 커진다.


미래학자 레이 커즈와일은 머지않아 인간이 죽음을 경험하지 않아도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한다. 이런 주장이 용인될 뿐만 아니라 진지하게 받아들여진다. 이들이 자신의 주장에 대해 과학적이고 납득할 만한 근거를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오늘날 미래에 대한 상상 자체가 받는 존중은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 미래에 대한 상상이 별 저항 없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미래가 지극히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기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가 과거보다 훨씬 더 불안정하고 불확실한 시대에 살게 되었음을 의미한다.


현대 기술은 상상이나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문제만 제기하는 것이 아니다. 첨단 기술 발달은 인간 자신과 물리적 환경을 바꾸는 동시에, 인간이 오랫동안 물어왔던 물음과 그 전제에 정면으로 도전한다. 예를 들어 죽음의 극복이 실제로 이루어진다면 우리는 더 이상 우리가 알던 인간이 아니라 새로운 존재자가 될 것이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는 이런 미래의 인간을 ‘호모 데우스’ 즉 ‘신이 된 인간’이라고 부른다.


좁은 의미에서 철학에서 대표적인 물음은 “인간이란 무엇인가?”, “존재란 무엇인가?”, “앎이란 무엇인가?”, “옳음의 기준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이고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 학문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과학이란 무엇인가?”는 과학적인 물음이 아니고 과학철학의 물음이다. “기술이란 무엇인가?”는 공학이 아니라 기술철학에서 다룬다.


철학은 당연한 것에 대한 의심, 혹은 경이의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기술철학은 인간 삶의 중요한 일부가 된 기술에 대해 의문을 던진다. 아직도 과학기술을 계속 발전시켜야 하는가? 이제 기술은 충분히 발전했으니 더 이상 발전보다는 기왕에 이룬 것을 골고루 나누는 데 신경 쓰는 것이 좋지 않을까? 도로이 법정 최고 속도는 시속 100km인데 시속 300km로 달릴 수 잇는 자동차 마력을 더 높이려는 이유는 무엇인가? 기술 발전이 인간의 삶을 어느 정도 향상했지만, 인간의 삶이 기술의 발전으로 끝없이 좋아질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기술의 발전이 종말 좋은 것이었는지, 어느 시점까지 좋았는지, 그 ‘좋음’의 의미가 무엇인지 분명치 않다.

윤리는 다른 사람에게 끼친 해악에 대해 칙임지고 보상할 것을 요구한다. 그런데 현대 기술 때문에 인간은 여러 세대 후의 자손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악행을 저지르고 있다.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은 유전자가 변이되고, 그것은 다음 세대로 유전되어 고통이 이어진다. 더구나 핵폭탄 등장으로 인간은 지구 전체를 멸망시킬 수 있는 능력까지 생겼다. 이렇듯 오늘을 사는 우리가 미래 세대와 자연 전체의 안위에 큰 영향력을 미칠 수 있다면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법은 시민이 만들지만 일단 만들어지면 시민의 삶을 규제하는 힘이 생긴다. 그래서 여러 사람에게 공평하게 적용되는 좋은 법을 만들어야 한다. 사림이 기술을 만들지만 일단 개발되면 인간과 사회의 여러 측면에 영향을 미치게 되기 때문에 좋은 기술을 개발해야 한다. 좋은 기술은 무엇일까? 삶을 풍요롭게 하고 더 많은 사람에게 더 큰 유익을 주는 기술일 것이다.


레이 커즈와일이 주장한 ‘특이점’은 기계의 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추월하는 시점을 말한다. 특이점에서는 인간과 기술을 분리하여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은 기계처럼 되고, 기계는 사람처럼 될 것이다. 기계와 비슷해진 사람, 사람과 비슷해진 기계는 모두 포스트휴먼이다. 포스트휴먼은 새로운 인간이다. 포스트휴먼을 실감 나게 표현한 일본의 에니메이션 영화「공각 기동대」가 있다.


로봇이 통증을 느끼고 반응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일 것이다. 통증은 인간과 만들어진 인간을 구분하는 중요한 척도가 될 수 있다. 통증에 대한 몸과 마음의 반응, 그리고 통증을 극복하려는 부단한 노력은 하나의 생명체로서 인간이 긴 역사에서 이뤄 온 중요한 부분이다. 그렇다면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로봇을 과연 인간과 비슷한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기술의 발전은 인류가 생각해 오던 인간에 대한 이해에 오류가 있음을 보여 준다. 기술을 통해 인간이 완전히 변하게 될 것이라고 예고한다. 이때 “어떤 인간이 될 것인가?”, 혹은 “어떤 인간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사람은 도구를 사용한다. 그래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라고 한다. 사람은 특정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도구를 만든다. 그 도구를 만드는 과정을 통해 삶의 맥락 자체를 바꾸어 버린다. 심지어 포스트휴머니즘은 기술의 발전을 통해 인간의 본성 자체가 바뀌어 새로운 종류의 인간이 생겨날 것이라고 주장한다. 인간이 기술을 만들지만, 기술도 인간을 만든다는 ‘호모 파베를의 역설’이 있다.


미국 메사추세츠공대와 독일 막스플랑크 연구소를 비롯한 7개국 18명의 과학분야 학자들은 2019년 3월 14일 향후 최소 5년간 인간 배아의 유전자 편집 및 착상을 전면 중단하고 이 같은 행위를 관리 감독할 국제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라는 유전자 편집 ‘모라토리엄’ 선언이 있었다. ‘한시적 중단’이라는 뜻을 가진 ‘모라토리움’이라는 단어로 표현했다.


생명 현상이 기술의 조작 대상이 된 지는 이미 오래되었다. 우리가 먹는 고기 대부분은 인공 수정을 통해 태어난 동물들이다. 작물들도 이런저런 방식의 유전자 조작을 거쳤거나 비닐하우스에서 화학 비료 등 일정하게 통제된 환경에서 재배하고 있다. 자연환경의 한계들이 하나둘 극복되면서 생명의 독자성은 사라지고, 생물마저 공장에서 만드는 물건처럼 조작과 선택의 대상이 되었다.


생명과학 기술의 발달로 원하는 만큼 수명을 늘리거나 죽음마저 극복하게 된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런 복잡하고 추상적이고 별반 이득도 없을 것 같은 일을 사유하는 수고를 해야 할까? 삶의 의미를 묻는다고 해서 오늘 나의 일상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지만, 그 물음을 묻는 자와 묻지 않는 자의 삶은 분명 다르다.


물질은 잘게 쪼개고 쪼기다 보면 무엇이 나올까? 물질의 가장 기본이 되는 입자는 무엇일까? 이런 물음에 대해 과학은 분자와 원자, ,원자핵과 전자, 양성자와 중성자, 쿼크 등 계속해서 새로운 답을 제공해 왔다. 그 입자들은 워낙 작아서 10억 분의 1을 의미하는 ‘나노’라는 접두어를 사용한다. 수소 원자의 지름은 약0.1nm, 적혈구의 지금은 7,000nm 머리카락의 지금은 80,000nm라고 한다. 기존 물질이 나노 수준에서 나타나는 여러 가지 특성들을 잘 활용하면 전혀 새로운 가능성이 펼쳐진다. 나노 기술은 그 활용 가능성을 볼 때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 나노 기술은 그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긍정적이건 부정적이건 의도하지 않은 결과를 양산할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에서 중요한 개념이 있다. ‘의도하지 않은 결과’라는 개념이다. 예를 들어 고엽제나 살충제 DDT, 발암 물질로 알려져 사용이 중단된 유리 섬유, 환경오염의 주범을 떠오른 플라스틱 등 신기술이나 신물질은 의도하지 않았던 문제를 초래했다. 과학이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학문이라고 한다면, 의도하지 않은 결과는 과학의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현대 기술이 예전과 전혀 다른 생활환경과 삶의 의미를 제공하기 때문에 기존의 철학적 물음들도 새로운 방식으로 제기될 수밖에 없다. 이제 삶, 앎, 기억, 판단, 소통, 죽음, 인간 등 우리 자신과 우리가 하는 일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가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이것이 현대 기술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직면한 현실이다.


미국 총기협회NRA는 개인의 총기 보유를 정당한 권리로 인정하는 미국 수정 헌법 2조를 수호하고, 총기 금지 법안 저지를 위해 로비 활동을 벌이는 단체다. 이 단체는 “총이 사람을 죽이는 게 아니라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라는 말을 내세워 총기 사건을 줄이기 위해서는 총기 판매와 휴대를 제한할 게 아니라 총기 오용을 강력하게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관점은 어떤 제한 조치를 반박할 때 자주 인용된다. 요컨대 기술은 중립적인 도구이고, 그것을 어떻게 사용하느냐의 문제는 사용자가 책임질 일이다. 식칼로 사람을 해칠 수 있지만, 요리도 할 수 있기에 칼 자체를 탓할 수 없다는 주장과 비슷한 맥락이다.


공학은 문제를 해결하고 필요를 충족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는 정의로 돌아가 과연 ‘누구’의 필요를 채우고 있느냐고 묻는다. 만약 인류의 10%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들이는 노력과 자본의 몇천 분의 1만으로 나머지 90%에게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해야 한다. 소외된 90%를 위한 공학 설계. 이러한 대안 기술을 ‘적정기술’이라고 한다.


기술로 인간이 미래를 좀 더 바람직하게 만들려면 기술의 정치가 필요하다. 이때 정치는 정치가들에게 맡겨진 좁은 의미가 아니라 사회의 모든 구성원이 참여하는 넓은 의미의 정치다. 모든 시민이 기술의 중요성을 알아야 한다. 기술 사회는 폭넓은 기술이 정치를 통해서만 좋은 세상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책 소개.

『미래와 만날 준비』 손화철 지음. 2021.01.28. 도서출판 책숲. 179쪽. 13,000원.


손화철. 서울대학교 철학과, 벨기에 루벤대학교 철학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지은 책, 『호모 파베르이 미래』, 『포스트휴먼 시대의 휴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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