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x Month with Buddha』「소설로 읽는 붓다의 가르침」
이 책은 『Six Month with Buddha』의 한국어판이다. 부제목은 「소설로 읽는 붓다의 가르침」이다.
등장인물로 본 줄거리는 전생에 자뚜는 장군이다. 부인은 아사타, 자뚜의 부하 담마딘나가 서로 인연을 맺고 금생에 환생한다. 자뚜는 왕이 되고 이름은 밧디야다. 아사타는 아유타로 이름이 바뀐다. 밧디야 왕의 왕비이다. 담마딘나는 음유시인으로 빙기사라는 이름으로 밧디야와 아유타의 예술교사가 된다. 아유타는 빙기사와 불륜을 저지르고 밧디야는 믿었던 아내와 예술교사의 배신으로 출가한다. 밧디야는 붓다의 비구제자 사리뿟다의 제자가 된다. 아유타는 붓다의 비구니 제자 웁빨라완나의 제자가 된다. 밧디야와 아유타는 깨달음을 얻고 서로 용서한다. 빙기사는 후루와교 전교자가 되고, 붓다의 수기(붓다가 뛰어난 수행자에게 “그대는 장차 붓다가 되리라”라고 말해주는 것)를 받고 밧디야와 화해한다. 붓다는 인연의 가장 밑바닥까지 떨어졌던 빙기사가 지금부터 16아승지겁ㅇ르 더한 십만대겁 후에 십력‧사무외지‧육불공지를 두루 갖춘 무상정등각자로서의 붓다가 되리라고 수기한다.
‘여래(如來)’. 붓다에게는 여러 이름이 있다. 사끼야족 출신의 성자(사끼야무니), 그러히 오신 분(여래), 신들과 인간들의 스승(천인사), 진리를 깨달으신 분(붓다), 세상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으시는 분((세존) 등.
불교는 우주에는 인간과 같은 고등 생명체가 사는 곳이 매우 많으며, 한 우주가 성립했다가 무너지는 동안에 인류가 여러 차례 멸망했다가 다시 성립한다고 본다. 따라서 각 인류 시기마다 붓다가 탄생함으로써 과거불, 현재불, 미래불이 있게 되고, 우리가 사는 이 우주 아닌 다른 우주에도 붓다가 있게 되는데, ‘여래’는 이들 모든 붓다를 아울러 지칭하는 용어이다.
십선(十善). 1, 생명 존재를 죽임. 2, 남이 주지 않는 것을 가짐. 3, 정당하지 않은 성행위. 4, 거짓말. 5, 이간하는 말. 6, 욕설. 7, 쓸데없는 말. 8, 탐욕. 9, 분노. 10, 어리석음. 열 가지를 하지 않는 착한 행위.
자유와 방종은 다르다. 방종은 법을 벗어나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이니 곧 욕망에 굴복하는 행위요, 자유는 법을 따르는 행위이니, 그것은 욕망을 극복함으로써 성취된다. 설법은 누구에게나 베푸는 것이 아니라 준비된 사람에게만 베풀어지는 것이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중생에게 하는 설법은 꽃을 피우지도 못하고, 열매를 맺지도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혜로운 스승은 그런 중생에게는 거룩한 침묵(붓다는 말하지 않아야 할 주제에 대한 질문을 받을 경우 침묵을 지키며 대답하지 않았다. 이를 거룩한 침묵이라고 한다.)을 지키며 다만 자신이 행해야 할 바를 행할 뿐이다.
사무량심. 남이 행복하기를 바람, 남의 고통을 함께 아파함, 남의 좋은 일을 기뻐함, 좋고 나쁨을 평등하게 받아들임 등 네 가지 마음. 한자어로 첫 번째 무량심은 자(慈), 두 번째 무량심은 비(悲)로 번역한다. 이 둘을 합쳐서 ‘자비’라는 말이 생겼다.
공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면서 무한한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가? 시간은 유한한가, 무한한가, 유한하면서 무한한가, 유한하지도 않고 무한하지도 않은가? 공간은 왜 있는가? 시간은 왜 있는가? 죽음은 왜 있는가? 삶은 왜 있는가?
죽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일체의 무화요. 죽음 앞에 이르러서는 가족도 무로 돌아가고, 친구도 무로 돌아가고, 재산도 무로 돌아가고, 학식도 무로 돌아가고, 미모도 무로 돌아가고, 권력도 무로 돌아가고, 공적도 무로 돌아가고, 명에도 무로 돌아간다. 그리하여 죽음은 적은 것을 가진 자에게는 작은 손실이 되고, 많은 것을 가진 자에게는 큰 손실이 된다. 그런 점에서 목동은 왕보다 낫고 왕은 목동보다 못하다.
불법 수행은 윤리적 실천인 계戒, 마음을 고요하고 행복하게 하는 정定, 통찰력을 계발하는 혜慧 세 가지 공부로 되어 있다. 객관적으로 보면 세계는 하나이지만 실존적으로 보면 세계는 둘이다. 나라는 세계 하나, 나를 제외한 모든 것들의 세계 하나가 따로 있다. 실존의 입장에서 볼 때, 세계가 탄생하는 때는 내가 태어나는 때이며, 세계가 멸망하는 때는 내가 죽는 때이다.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만일 현명하고 잘 협조하는 벗을 얻을 경우 기쁜 마음으로 그와 함께 가라. 그러나 그런 벗을 얻지 못하거든 그대여,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자신이 정복한 왕국을 버리고 홀로 지내는 왕과도 같이.
처자도 부모도 친구도 친척도 재산도 명예도 모두 버려라. 그것들은 나무를 휘감고 있는 무성한 등넝쿨이다. 그러니 그대여,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등넝쿨을 단칼에 베어낸 다음 흔연히 미소 짓는 남자와도 같이.
이것이 무지로구나, 이것이 욕망이로구나, 하고 알라. 그것들은 그대를 가두는 크나큰 그물이다. 그러니 그대여,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그물에 걸린 큰 물고기가 그물을 찢고 대양으로 나가 유유히 헤엄치듯이.
선정에 잠겨 고요를 즐기라. 해탈한 마음으로 자비를 베풀라. 이것이 수행자가 얻어야 할 바요, 행해야 할 바이다. 그러니 그대여,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홀가분하게 무소유자가 되어 숲속이나 무덤가에 눈을 감고 앉아서.
큰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와 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 같이, 흙탕물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과 같이, 그대여, 코뿔소의 외뿔처럼 혼자서 가라, 괴로움의 세계를 멀리 떠나 출세간이 길을 따라서.
위빠싸나. 자신의 몸, 느낌, 마음, 법 등 네 가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명상법. 붓다의 명상법은 집중력을 이용하는 사마타와 통찰력을 이용하는 위빠사나로 나뉘는데, 사마타 명상은 힌두교,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 등에 보이는 명상법과 유사하지만 위빠싸나 명상은 오직 불교에만 있다. 우리말로는 ‘마음 챙김’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개와 같은 사람과 사자와 같은 사람이 있다. 만일 누가 돌을 던질 경우, 개는 돌을 따라 달려가지만, 사자는 돌을 던진 사람을 향해 달려들 듯이, 사람은 남의 말을 따라가는 사람과 말하는 이의 마음을 관찰하는 사람으로 나뉜다.
모든 위대한 종교는 초합리한 교리를 제시하게 마련이다. 왜 그런가. 그것은 종교의 본질이 ‘궁극 관심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궁극 관심이란 죽음을 어떻게 넘어설 것인가, 번뇌를 어떻게 해소할 것인가, 지고한 행복을 어떻게 달성할 것인가 등 삶의 유한성으로부터 일어나는 궁극적인 의문들에 대한 일체의 마음 씀을 의미한다. 궁극 관심은 합리를 기반으로 성립하는 세속 학문으로는 충분히 궁구될 수 없다. 모든 종교가 궁극 관심에 답하기 위해 합리를 포기하고 초합리적인 교리를 제시한다.
중생은 사후에 과보를 받음에 있어 선한 과보를 먼저 받기도 하고, 악한 과보를 먼저 받기도 한다. 중생이 다음 생에 어떤 과보를 먼저 받는가는 그가 죽음을 맞는 마지막 순간에 어떤 것을 기억하는가에 달려 있다. 인간이 수양과 덕행은 결코 완전함에 이를 수 없다. 인간은 자신의 힘으로는 자신을 구언할 수 없다. 따라서 인간이 행해야 할 바는 오직 신 앞에 엎드리는 단 한 가지뿐이다. 인간이 신의 소유물이라는 사상은 인간을 신의 수단으로 보는 사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신과 마음 가운데 마음이 신에 우선한다. 마음법 기초는 앎이다. 앎은 일상적으로 쓰이는 앎이 아니라 ‘식識’으로서의 앎인데, 그것은 생명체가 태어나는 순간에. 까무러쳤던 사람이나 잠자던 사람이 깨어나는 첫 순간에 생겨난다. 십이처(十二處), 십팔계(十八界). 눈‧귀‧혀‧피부‧마음 등 주체 여섯과 그 대상으로서의 색깔과 모양‧ 소리‧냄새‧맛‧감촉‧마음‧대상 등 객체 여섯에 마음이 활동하는 마당을 의미하는 ‘처’를 붙여 ‘십이처’라하고, 십이처에 안식‧이식‧비식‧설식‧의식 등 인식을 뜻하는 여섯 ‘식’을 합친 다음 그 열여덟에 마음이 활동하는 세계를 의미하는 ‘계’를 붙여 ‘십팔계’라고 한다.
가정은 세속 사람에게 천국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가정에는 때로 먹구름이 끼게 된다. 그것은 모든 가정 구성원이 언제 어느 때나 마음이 맞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 때 그들의 천국은 천국 아닌 곳으로 변한다. 부부의 마음의 엇갈리는 때도 있다. 그 경우 남편은 아내를 위로하려고도 하고, 설득하려고도 하고, 아내를 피해 집 밖으로 나가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고, 다른 사람에게 하소연하기도 하고, 짜증 나는 마음을 꾹 눌러 참기도 하고, 화를 내기도 한다.
불법佛法의 진수를 아는 불제자는 아내를 향하고 있는 마음을 자기 자신으로 되돌려 위빠싸나 명상을 수행한다. 그런 끝에 마음에 일어난 부정적인 감정을 완화‧해소한다. 잠시 후 그는 더 넓어진 마음으로 아내를 향해 진심으로 위하고 배려하는 마음을 내어 행동하게 된다. 그때 아내가 남편의 배려 깊은 행동을 받아들인다면 그들 부부는 다시 천국을 회복하게 된다.
불법佛法은 앎이 믿음보다 상위의 인식을 제공한다는 점에 근거하여 앎의 길로서의 깨달음의 길을 제안한다. 깨달음의 본질은 곧 앎이다. 다만 깨달음은 일반적인 앎과는 다른 특별한 앎이다. 깨달음은 사성제라는 틀 안에서 얻어지는 앎이요, 여느 앎이 타인‧타물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어지는 데 비해 깨달음은 자기 자신을 대상으로 추구해 얻는 앎이다.
아흔아홉 마리 양을 방치한 채로 한 마리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어버이의 마음이요, 좌절한 자, 실패한 자를 만났을 때 객관적‧합리적인 관점을 잠시 거두고 주관적‧실존적인 관점을 취해 실패하고 좌절한 이를 끌어안아 위로해 주는 보살의 마음이다.
외부의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괴로움은 가장 밑바닥 괴로움은 아니니, 가장 큰 괴로움은 그 원인이 자신에게 있는 괴로움이다. 그 경우 그는 아무에게도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오직 자신만을 견책할 수 있을 뿐이니, 그 결과 그는 극심한 자괴감과 무력감에 떨어진다.
빨리대장경, 한역대장경, 티베트대장경 3대 불교 경전의 핵심 사상을 근거로 한 소설이다. 마음에 와닿는 좋은 글귀가 많다. 다시 또 읽어야 하겠다.
책 소개.
『그대는 장차 붓다가 되리라』 김정빈 지음. 2022.05.08. 도서출판 덕주. 472쪽. 16,500원.
김정빈. 198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동화로 등단. 1984년 소설「단 丹」 발표. 1985년 불교에 귀의하였다. 저서. 『도』, 『숭어』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