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 관련 서적을 읽을 때마다 등장하는 책이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이다. 어떤 내용인지 궁금했다.
『고백록』은 서양 고대 세계가 끝나면서 나타난 위대한 사상가의 ‘자서전’이면서 고중세의 대표적인 ‘실존철학서’로 평가받는 세계문학전집에 들어가는 문화유산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로마 제국 말기, 문화사적으로는 그리스와 로마의 고대문화가 쇠퇴하고 붕괴하는 역사적 시점에 카르타고에서 수사학과 고전 문학 그리고 철학을 배웠다. 16세부터 철학과 마니교에 심취하였다가 서기 387년 개종하여 33세의 나이로 가톨릭 세례를 받았다. 『고백록』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인 후 서기 397년~400년에 집필하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고백록에서 자기 자신을 적나라하게 밝힌다. 방탕함, 신앙의 결여, 자만심, 세간의 인식에 의한 행동, 어머니에 대한 본심, 친구에 관한 평가 등 인간이 갖고 있는 고민과 할 수 있는 행위에 대해 하느님께 고백한다. 특히 본능에 이끌린 여자와의 관계에 대해 세세하게 고백한다. 그래서 이 고백록이 고전이 되고 여러 사람에게 읽히고 있다는 것에 동의한다.
특히 나이가 어릴 때, 판별력이 부족할 때 인간은 실수한다. 나 역시 그런 점이 있다. 그러나 누구나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처절하게 고백하지 않는다. 왜? 살아있기 때문이다. 내가 생존해 있는데 나의 실수를 인정하라는 것은 힘든 것이다.
아내가 없는 남자는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까, 하고 하느님의 일을 생각한다. 그러나 혼인을 맺은 남자는 어떻게 하면 아내의 마음에 들까, 하고 세상일을 생각한다. 색욕으로 저지른 소행을 단지 해도 괜찮을뿐더러 도리어 기려줄 일이라도 되듯이 마음에 들어했다. 젊은 혈기를 산 채로 잘라낼 수 없을 바에야, 굳이 부부연 이라는 테두리에 묶어두는 일은 해로울뿐더러 장래에 위험까지 하다고 생각하였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남녀 관계가 없다면 인류는 유지될 수 없다. 모두 신부가 되어 결혼하지 않는 세상을 상상할 수 없지만 ‘어떻게 하면 하느님 마음에 들까’만 생각하는 사람만 있다면 인류는 영속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죄스러운 애욕의 냄비가 사방에서 나를 달구고 튀겼다. 아직 사랑하지 못하던 터여서 그냥 사랑하기를 사랑할 뿐이었으며 영문 모를 허전함 때문에 아직 덜 허전한 내가 미워졌다. 오로지 사랑하기를 사랑하면서 사랑할 만한 거리를 찾아 헤맸고 그러면서도 안전하고 올가미가 놓이지 않은 길이면 오히려 혐오했다. 구접스럽고 부정직한 인간 주제에 번지르르한 허영에 사로잡혀 의젓하고 교양 있는 척 행동했다.
아름다운 물체, 금이나 은이나 그런 모든 것에는 형상이 있다. 육체의 접촉엔 교감이 특히 강하고 나머지 감각들에는 저마다의 감관에 부합하는 물체들의 조정이 있다. 그와 마찬가지로 현세 영예라는것도 명령을 내리고 지배하는 권력으로 인해서 나름대로 기품을 지니므로 그것을 옹호하려는 욕심이 발생한다.
무릇 사멸하는 사물에 대한 우애에 사로잡힌 마음은 모두 불행하고 사랑하던 것을 잃고 나면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진다. 제가 사랑하던 사람은 정작 죽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사멸할 존재이면서도 멀쩡히 살아있는 것이 이상했다. 그가 죽었는데도 ‘또 한 사람의 그’였던 저는 살아있다는 것이 더 이상했다. 누군가 자기 친구를 가리켜 ‘자기 영혼의 반쪽’이라고 한 말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다.
시간이란 쉬지 않으며 마음에다 기기묘묘한 작업을 해놓는다. 날에 날을 이어 오고 가고 하였으며 그렇게 오고 가고 하면서 또 색다른 희망 또 색다른 기억을 심어주었다. 나의 그 고통이 단념하고 있던 옛날의 재미가 서서히 나를 메워갔다. 하지만 뒤따르는 것은 같은 고통은 아니어도 여전히 또 다른 고통의 원인이었다.
저 사람은 구걸해서 얻은 보잘것없는 동전 몇 닢으로 그것을 벌써 획득했는데, 저는 그것을 얻자고 그 토록 마음 고생을 하며 구불구불하고도 뱅뱅 도는 험로를 싸돌아다니고 있다고, 그것도 다름아닌 현세 행복의 기쁨을 얻자고 그런다고 했다. 그 사람은 분명히 즐거워하고 있었고, 저는 근심에 사로잡혀 있었으며 그는 태평한데 저는 안절부절 못 하고 있었다. 제가 그보다 박식하다고 해서 그 사람보다 내가 더 낫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했다. 박식하다는 그 일로 해서 내가 즐겁지도 않았던 까닭이요. 그것으로 단지 사람들 마음에 들려고 모색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인생은 비참하고 죽음은 불확실하다. 갑자기 들이닥친다. 우리는 이승을 과연 어떻게 빠져나갈까? 이승에서 소홀히 했던 것을 우리는 어디서 배운단 말인가? 그보다 그 소홀함의 벌을 받아 마땅하지 않겠는가? 만약 죽음이 감관과 더불어 모든 번뇌를 제거해 버리고 끝장낸다면? 그러니 이것도 따져봐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본인이 경험하거나 남의 말을 믿거나 모두 기억의 대상이라고 한다. “나는 안에서 이 일을 한다. 내 기억의 거대한 궁정 속에서 한다. 거기서는 하늘도 땅도 바다도, 그것들 안에서 내가 감지할 수 있었던 모든 것들고 더불어 내 앞에 현전하고 있다. 내가 망각한 것을 빼놓고는 말이다. 거기서 내가 나를 만나며, 내가 무엇을 언제 어디서 어떤 모양으로 했는지도 거기서 기억하고 그것을 했을 적에 어떤 기분이었는지도 거기서 기억한다.” 쾌감은 자태가 예쁘고, 음성이 곱고, 냄새가 감미롭고, 음식이 맛깔스럽고, 만지면 보드라운 것을 찾는 데 비해서 호기심은 이것들과 정반대되는 것들마져도 시도해 보고 경험해 보고 알아볼 욕심에서 우러나는 것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제11권, 「하느님이 하늘과 따을 창조하신 태초에 관한 주석」에서 시간에 관해 말한다.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기 전에 하느님은 무엇을 하고 계셨더냐? 라고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이 질문에 대하여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르는 것은 모른다”라고 대답한다. 모든 과거는 미래에 의해서 밀려나고 모든 미래는 과거에 의해서 뒤쫓기며, 모든 과거와 미래는 항상 현재 하는 것에 의해서 조성되고 전개된다는 사실을 누가 알 수 있는가.
시간이란 무엇인가? 만일 아무것도 지나가지 않는다면 과거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테고, 아무것도 닥쳐오지 않는다면 미래 시간은 존재하지 않을 것이며,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현재 시간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과거는 이미 존재하지 않고 미래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다. 현재가 만일 항상 현재로 있고 과거로 옮겨가지 않는다면, 더 이상 시간이 아니고 영원일 것이다. 현재가 시간으로 존재하려면 과거로 옮겨가야 하고, 과거로 옮겨감으로써 시간이 된다.
낮 시각과 밤 시각 전부해서 스물 네 시로 하루가 찬다. 그 중 첫 시각은 나머지를 다가올 시각으로 두고 있고, 맨 마지막 시각은 나머지를 지나간 시각으로 두며, 중간 시각은 지나간 시각을 앞에 다가올 시각을 뒤에 두고 있다. 또 그 한 시각마저도 도망치는 작은 토막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한 시각의 어느 것이 훌쩍 지나가 버리더라도 그것은 과거이고, 남아 있는 것은 미래다. 제아무리 미소한 부분의 순간으로도 여하한 부분으로도 쪼개질 수 없는 순간, 바로 그것만이 현재한다고 말해야 한다. 그런데 그 순간도 잽싸게 미래에서 과거로 날아가 버려서 어떤 동안으로도 연장되지 못한다.
미래와 과거가 존재한다면, 어디에 존재하는가? 어디에서 존재하든 거기서 미래로서 존재하지도 않고 과거로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현재로서 존재한다. 만약 거기에서도 미래로 존재한다면 아직 거기 존재하지 않을 테고, 거기에서 만일 과거로 존재한다면 벌써 거기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들이어디 존재하고 무엇으로존재하든, 현재로서가 아니면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미래가 보인다고 말할 경우는, 아직 존재하지 않는 것, 즉 닥쳐올 것 자체는 아니고, 닥쳐올 것들의 인과 혹은 표징이 보인다. 그런 것을 보는 사람들에게는 미래가 아니고 이미 현재이며, 그것들로부터 영혼에 개념 된 것들이 마치 미래처럼 예고 된다. 먼동을 바라보고 있으면서 해가 뜨리라고 예보한다. 내가 바라보는 것은 현재이고 내가 예보하는 것은 미래이다. 해가 미래가 아니니 이미 존재하는 까닭이고, 일출이 미래이니 아직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미 존재하고 보이는 것들,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의해서 예고될 수는 있다.
분명하고 확실한 것은 미래도 존재하지 않고, 과거도 존재하지 않고, 시간이 과거, 현재, 미래 셋이라는 말도 적절하지 않다. 차라리 시간이 셋인데 과거에 대한 현재, 현재에 대한 현재, 미래에 대한 현재라고 하는 편이 적절하다. 이 셋은 영혼 속에 존재하는 무엇이고 과거에 대한 현재는 기억이고 현재에 대한 현재는 주시注視이며, 미래에 대한 현재는 기대이다.
현재하는 지향이 미래를 과거로 끌어당기는 가운데 미래가 줄어들수록 과거는 늘어나서 미래의 소진으로 인해서 전체가 과거가 되기까지 그 일이 수행된다. 그런데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미래가 어떻게 줄어들고 소진된다는 말이며, 더 이상 존재하지도 않는 과거가 어떻게 늘어난다는 말인가? 그런 작업을 하는 영혼 안에 셋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영혼은 기대고 하고 주시도 하고 기억도 한다. 기대하는 바가 주시하는 바를 거쳐서 기억하는 바로 옮겨간다. 기나긴 미래 시간은 존재하지 않고 미래에 관한 기나긴 기대가 있을 뿐이다. 기다란 과거 시간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과거에 관한 기억이 있을 뿐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생각을 너무나 잘 표현했다. 책을 읽으면서 글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 이렇게 쉽게 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기독교 신앙을 믿음으로 표현하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감명 깊게 읽었다. 이 책은 여러 번 읽으면 좋을 것 같다.
책 소개
『고백록』 지음. 성염 옮김. 2016.03.03. 경세원. 573쪽. 28,000원.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354~430).
기독교 신학자이자 작가로, 354년 11월 13일에 로마 제국의 북아프리카 지역인 히프시두스에서 태어나서, 430년 8월 28일에 알제리의 히프시두스에서 세상을 떠났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초기 기독교 신학의 중요한 인물로, 인간의 죄와 구원에 대한 깊은 사유를 통해 기독교 신학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주요 작품들로는 『고백록 Confessions』와 『The City of God』 등 100권이 넘는 저작이 있다. 『고백록 Confessions』은 자신의 삶과 신앙 경험에 대한 회고록이며, 『The City of God』는 기독교와 로마 제국의 몰락에 대한 해설서이다.
성염. 1942년 전남 장성 출생. 가톨릭대학교및 광주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 석사. 로마 교황립 살레시안대학교에서 라틴문학박사. 한국외국어대학교 철학과 교수.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 2003~2007 주교황청 한국대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