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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자잔혹사』

『A JUDGEMENT IN STONE』

by 안서조

이 책의 원제목은 『A JUDGEMENT IN STONE』이다. 직역하면, ‘석기 시대 재판’ 정도일 것이다. 범죄 잔혹 소설이다.


이야기는 ‘유니스 파치먼(범인)이 커버데일 일가를 살해한 까닭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로 시작한다. 뚜렷한 동기도 치밀한 사전 계획도 존재하지 않았다. 금전적 이득도 안전 보장도 없었다. 심지어 자신이 저지른 범죄의 여파로 그녀의 무능력은 한 가족과 몇 안 되는 마을 주민에게는 물론 온 나라에 알려지게 되었다. 스스로에게 재앙을 불러왔을 뿐이다.


읽고 쓸 줄 아는 능력은 문명의 초석이다. 문맹은 기형으로 취급된다. 육체적으로 기형인 사람들을 겨냥하던 조롱의 방향이 문맹인 사람들 쪽으로 점차 바뀌어 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른다. 만일 문맹자가 교육받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서 조심스레 살아가려 한다면 별 탈 없이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눈이 나쁜 사람들의 나라에서 장님이 배척당하지 않고 살 수 있는 것처럼.


유니스를 고용해서 그녀를 아홉 달 동안 집에 둔 사람들이 유별나게 많이 배운 축에 속했다는 사실은 유니스에게나 그들에게나 불운이었다. 만일 이 가족이 교양 없는 사람들이었다면 그들은 현재까지 살아 있었을 테고, 유니스는 활자가 완전히 부재한, 그녀 자신의 감각과 본능으로 구성된 비밀스러운 세계 속에서 자유롭게 살아갔으리라.


살해당한 가족은 부유한 중산층에 속했고, 그들과 비슷한 계층의 다른 가족들과 마찬가지로 시골 저택에서 평범한 삶을 영위하고 있었다. 조지 커버데일은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하여 학위를 받았으나 아버지 사업을 이어받아 스탠트위치 외곽에 있는 1930년대풍 저택에 거주했다. 그는 아내와 피터, 폴라, 멜린다 세 명의 자식과 함께 멜린다가 열두 살 되던 해, 아내가 암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렇게 계속되었다.


아내가 죽은 후 커버데일은 친구의 파티에서 재클린을 만나 재혼한다. 재클린은 집안일을 도울 하녀를 구한다. 바로 유니스 파치먼이다. 유니스 파치먼은 문맹이다.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른다. 유니스는 교회에 나가서 부정한 아내라는 딱지를 단 조앤을 만난다. 조앤은 매춘부였다. 조앤은 극심한 광란에 빠지고 광신에 휘말려 있었다. 남편인 노먼도 감당할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조앤은 유니스에게 커버데일 일가를 죽이자고 한다.

커버데일의 집 총기실에 있는 엽총을 꺼내 텔레비전을 보고 있는 일가족을 총으로 살해한다. 사건 직후 차를 운전해서 집으로 가던 조앤은 담벼락을 들이받고 중상을 입고 식물인간이 된다. 유니스는 검거되어 조사받는 과정에서 문맹이라는 사실이 밝혀진다.


음악이 그쳤다. 분명 조앤이 텔레비전을 껐으리라. 총소리와 비명소리도 그쳤다. 침묵은 더욱 깊어져, 그녀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맹렬하게 뛰는 가슴을 진정시켜 주며, 만질 수 있을 정도로 짙은 향유 냄새처럼 응접실을 가득 채웠다. 침묵은 유니스를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들었다. 이 석기 시대 여인을 아예 돌로 만들어 버렸다. 그녀는 눈꺼풀을 떨구고 숨을 천천히 골랐다.


유니스 파치먼은 올드 베일리, 즉 중앙 형사 법원에서 재판을 받았다. 그녀는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실제 수감 기간은 십오 년 남짓으로 예상되었다.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유니스는 이미 벌을 받았다. 배심원단이 평결이 나오기도 전에 참담한 꼴을 당해야 했다. 그녀의 변호사가 판사와 검사, 경찰, 방청객, 기자석에서 기사를 갈겨쓰고 있는 기자들 앞에서 그녀는 글을 읽거나 쓸 줄 모른다는 사실을 전 세계에 공표해 버린 것이다.


“문맹이라고요?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말입니까?” 메너튼 판사가 물었다. 그가 답변을 강요하자 그녀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새빨갛게 얼굴을 붉힌 채, 자신처럼 괴물이나 불구자가 아닌 사람들이 기사를 쓰는 모습을 바라보며.


흔히 문맹이라면 ‘글을 읽고 쓸 줄 모르는’ 상태만을 떠올리는 데, 이 작품을 쓴 루스 렌들의 통찰은 문맹은 그 당사자의 ‘상상력과 감정’마저 문맹의 상태로 만든다. 작가는 유니스를 가리켜 “그녀가 문맹이라는 사실은 그녀의 동정심을 앗아갔고 상상력을 위축시켰다. 심리학자들이 애정이라고 부르는, 타인에 대하여 관심을 가질 수 있는 능력은 그녀의 기질 안에서 설 자리가 없었다”라고 평했다. 문맹은 인간에게 필요한 자신감과 자긍심을 빼앗고, 정상적인 인간관계와 소통을 기피하게 만든다.


문맹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가를 이 소설은 보여준다. 제목이 ‘활자잔혹극’이다. 우리나라에도 전 국민의 90% 이상이 문맹인 시절이 있었다. 세종대왕이 아니었다면, 아직도 상당수가 문맹인 상태로 지내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종대왕의 통찰과 위대한 업적에 새삼 감사하는 마음이 충만해진다.


책 소개

『활자잔혹극』 루스 렌들 지음. 이동윤 옮김. 2024.06.18. 북스피어. 311쪽. 16,800원.

루스 렌들 RUTH RENDELL.

1930년에 태어난 영국 작가. 사람의 심리를 꿰뚫는 통찰력과 구성력이 돋보이는 스토리를 결합한 범죄 소설로 유명하다. 1964년 데뷔하여 웩스포드 경감 시리즈로 인기를 얻었다. 골드 대거 상을 3회 수상한 영국 최고의 스릴러 작가.


이동윤. 서울대학교 사회학 전공.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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