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배우다
이 책은 예란 그립이 1989년 7월 스웨덴 웁살라에서 엘리자베스의 강연 녹취록 내용을 엮어 1991년 책으로 펴냈다. 책 표지에 “‘죽음학’의 대가, 『인생 수업』의 작가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가 들려주는 네 번의 강연”이라는 카피가 달렸다. 또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서 삶의 의미를 배우다’라는 카피도 있다.
책을 읽고 느낀 것은 좀 더 일찍 이 책을 읽었으면 내 인생이 조금은 달라졌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충 살았던 시간에 대한 후회와 남은 인생이라도 진중하게 보내야겠다는 다짐을 해본다. 좋은 책이다.
책 중에 공감이 가는 부분을 옮겼다.
지상에 남은 유일하게 정직한 인간은 정신질환자와 어린아이, 임종을 앞둔 사람이다. 진정으로 그들의 말을 경청한다면 그들에게서 상징적 언어가 무엇인지 배우게 된다. 고통으로 힘든 사람들, 쇼크 상태의 사람들, 몸과 마음이 완전히 굳어버린 사람들,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비극을 겪고 큰 충격에 빠진 사람들은 이런 언어를 사용한다. 죽음을 앞둔 아이들, 자신이 곧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아는 아이들은 배운 적 없어도 이런 언어를 쓸 줄 압니다. 상징적 언어는 전 세계 모든 사람이 사용하는 보편적 언어다.
다섯 살이건 쉰다섯 살이건 죽음을 앞둔 사람들은 모두가 자신의 죽음을 안다. 그래서 ‘그에게 죽음을 알려야 하나.’를 고민할 필요가 없다. 다만 ‘그의 말을 들어줄 수 있을까?’라고 고민해야 한다. 환자가 당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하자. “7월 너의 생일에 난 없을 거야.” 그때 그 말을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주기만 하면 된다. “그런 말 하지 마. 없기는 왜 없어. 당연히 있지.” 억지로 그런 말을 하면 환자와 소통이 중단될 뿐이다. 당신이 아직 들어줄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환자가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 대답은 환자의 입을 틀어막을 것이고 환자에게 아무도 곁에 없다는 쓸쓸한 기분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환자들은 자기 심정을 잘 터놓지 않는다. 듣는 사람이 불안을 느끼는 것을 염려해서다. 그래서 날씨 이야기를 한다. 날씨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불안을 알기 때문에, 자신의 문제로 괴롭히고 싶지 않아서이다. 공연히 상대의 불안을 키웠다가 가버릴 것을 걱정하기 때문이다.
런던 융 학파 정신분석가 수잔 바흐는 아이들이 즉흥적으로 그린 그림을 해석하는 방법을 개발했다. 그녀는 취리히의 한 병원에서 아동 치료를 담당했는데, 수잔은 뇌종양을 앓는 아이들에게 즉흥적으로 그림을 그려보라고 했다. 그 그림을 통해 아이들이 자기 병을 알고 있고, 심지어 머리의 어느 부위에 암이 있는지도 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시간을 내야 한다. 주변 사람들의 말을 귀 기울여 그들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열심히 들어주어야 한다.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겠거든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못 알아들었어. 다르게 표현해 줄 수 있겠니?”라고 겸손하게 되물어야 한다. 한 번이라도 그런 대화를 나누어 보면 그게 생각만큼 어렵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죽음을 앞둔 사람들에게서 우리가 배울 수 있는 것은 죽음의 과정만이 아니다. 풀지 못한 한을 훌훌 다 털어버리고 편안하게 사는 법도 배울 수 있다. 진정으로 사는 사람들은 삶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정으로 산다는 것은 풀지 못한 한이나 이룰 수 없는 바람을 품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되려면 어린 시절을 잘 보내야 한다. 안타깝게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많지 않다.
모든 인간은 네 개의 사분면으로 구성된다. 신체, 정서, 지성, 영성과 직감이다.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오직 신체로만 이루어지진 생명체이다. 그 아이가 자연스럽게 성장하려면, 삶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발전하려면 생후 1년 동안 큰 사랑과 애정과 관계와 신체접촉이 필요하다. 노인들은 관계와 사랑과 포옹을 갈망한다. 우리 사회에서 아무 조건 없이 우리를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보통 노인이다.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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